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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20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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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최 회장이 위스키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겨우 회복 중이었는데 또 이런 일이……!”



정혁은 맞은편에 앉아 최 회장의 흔들리는 눈을 쳐다봤다. 

20%나 폭락했던 주가를 겨우 수습 중이었는데 오늘 일어나 보니 또 하루 만에 곤두박질쳤다.

정혁이 최 회장의 빈 잔에 정중히 위스키를 채워 줬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번엔 그때만큼 떨어진 건 아니니 5% 이내로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연달아 이런 일이 생기면 개미들부터 동요하게 될 텐데. 저번에 버틴 개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위험해져. 큰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최 회장이 심각하게 얼굴을 구겼다.


이미 세양그룹은 경영 문제로 잡음이 흘러나온 지 오래된 상태였다. 

얼마 전 인터넷상에 퍼진 자동차 매장 갑질 파동은 회사 측에서 거금을 투입해 무마시켰지만 이번엔 주가 폭락의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위스키를 마시는 최 회장에게 정혁이 말했다.



“이때 추격 매수를 해야 합니다.”


“또?”



최 회장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주가 방어를 위해 이미 큰돈을 투입한 이후였다. 인상을 쓰는 최 회장에게 정혁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흔들리면 앞에서 투입한 자금은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주식을 매수해서 건재하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 합니다. 회복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동요하던 투자자들도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최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잔을 매만졌다.



이론상으로는 그게 맞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경영난 때문에 힘든 상황에선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대놓고 회사 측에서 사들일 수도 없으니 임원들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임원들 역시 최근 여러 가지 일로 말이 많아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최 회장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정혁이 다시 말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십시오. 그 뒤는 제가 받치겠습니다. 그때 태원을 터뜨리면 모든 화제가 그쪽으로 넘어갈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시면 됩니다.”



테이블을 응시하며 잔을 매만지던 최 회장이 정혁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태원이 그렇게 당하고 나면 자네를 가만둘 리가 없을 텐데 정말 괜찮겠나? 해외로 뜬다고 해도 못 찾아낸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이는 거니까.”



정혁이 단정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도 없어 보였다. 최 회장이 그 얼굴을 눈을 가늘이고 쳐다보고 있는데 정혁이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건 회장님의 준비가 끝나야 한다는 겁니다. 태원의 비리를 터뜨리는 순간 제가 바로 이 나라를 뜰 수 있게 모든 준비를 확실히 끝내 두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 말게. 그래야 그 뒤의 과실이 내 차지가 될 거 아닌가. 그건 자네가 안전해진 뒤에 보장받는 거니.”


“거래는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정혁은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최 회장의 잔이 빌 때마다 예의 있게 술을 따라 줬다. 

이번에도 그 잔을 익숙하게 받아 마신 최 회장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이번 주 안으로 주식 양도 절차가 끝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거야.”


“…….”



정혁의 입술이 드러나지 않게 휘어 올라갔다. 곧 물 잔이 그 입술을 가리고 목을 축인 정혁이 잔을 내려놨다.



“그럼 그렇게 알고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양도가 마무리되면 연락 주겠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정혁이 프라이빗 룸을 나갔다.



최 회장은 정혁이 나간 문을 잠시 쳐다봤다.



“정당한 대가라.”



술잔으로 시선을 옮긴 최 회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지훈이 태원에서 오랜 기간 모아 둔 건 비리 증거만이 아니다. 



최 회장은 태원의 비리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태원이 망하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걸 위해 위험을 감수할 만큼 자신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그래서 별다른 구미는 당기진 않았지만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이렇게까지 비리를 모아 둔 이유가?’


‘그저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복수?’


‘네. 제 인생을 그 회장이 망쳐 놨기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할 때의 김지훈은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 담긴 살의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 눈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증오할 때에야 나올 수 있는 감정이었다.



‘자세한 내용까진 알지 못하지만 그 소문덩어리 회장이 김지훈에게 보통 원한을 심어 준 건 아니라는 건데.’



최 회장이 예리하게 눈을 떴다. 별 관심 없던 그의 복수에 흥미를 느낀 건 그다음에 이어진 제안이었다.

그 복수를 위해 김지훈은 회사의 불법 비리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 사업의 기술 계약을 전부 이면 계약 했다.



‘그걸 태원에서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건 그 모든 책임자는 김지훈의 말처럼 그라는 뜻일 거고.’



동시에 서정혁 회장은 김지훈이 계약한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는 건 김지훈이 태원의 비리를 터뜨리고 해외로 갔을 때 태원에선 사건을 처리할 제대로 된 책임자조차 없다는 거였다. 

그것도 전부 김지훈 역할일 테니.



그 혼란을 틈타 김지훈이 해외로 무사히 넘어가게 되면 계약상의 결격 사유로 인해 태원의 핵심 기술은 전부 계약 2순위였던 세양이 가져오게 된다. 

그 사업들로 세양은 경영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였다. 

김지훈이 이면 계약 한 건들은 국내에선 단 하나뿐인 독점 기술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결국 김지훈의 복수가 완성되어야 하고 해외 어딘가로 피신해 안전을 확인한 그가 최종 승인을 해 줘야 한다. 

계약이 넘어오게 되는 최종 승인 결정권자는 태원이 아닌 김지훈으로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준비해 온 김지훈의 완벽주의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게 복수심 때문이든 뭐든, 나에게 유리하면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의 손해는 없었다. 

그 이득을 위해서라면 김지훈이 요구한 세양의 주식은 껌값이라는 생각까지 들자 최 회장의 검버섯 핀 얼굴에 느물거리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김지훈의 복수심을 이용해 태원의 핵심 기술을 집어삼킨다, 이것만큼 구미가 당기는 일이 또 있을까.



최 회장은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남은 술을 제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정혁은 자신의 차 앞에서 걸음이 느려졌다. 

그의 차에 기대서 있던 최지윤이 정혁을 보고 미소 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짧은 원피스 때문에 허벅지 절반 이상을 드러낸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우리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신가 봐요. 이런 데서 만나는 걸 보면.”



여긴 정·재계 인사들이 긴밀한 접견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이었다. 

지윤이 그 점을 꼬집자 정혁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아버지 만나러 온 겁니까.”


“아뇨. 김지훈 씨 만나러 온 건데요.”



똑바로 시선을 맞춘 지윤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도 남자 따라다니는 거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닌데 당신이 나에게 시간을 전혀 내 주지 않으니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되네요.”



지윤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유혹하려는 속내를 숨기려 들지 않는 그녀를 정혁이 잠시 바라봤다.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내가 최지윤 씨를 만나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말투는 정중하지만 자존심을 긁는 말임에도 지윤은 웃음을 유지했다.



“사람이 꼭 이유가 있어야만 만나는 건 아니죠. 특히 남자와 여자는.”


“…….”


“아니, 그 이유라는 게 꼭 필요하다면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당신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지윤은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갔다. 정혁과 거리를 좁힌 그녀가 마스카라로 아찔하게 올린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였다.



“……난 더 다양한 걸 줄 수 있을 텐데.”


지윤이 그의 슈트 위로 단단한 가슴을 손끝으로 은밀히 쓸었다. 그대로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는 아까부터 숨길 수 없는 성적 신호들이 있었다. 그걸 정혁 역시 모르지 않을 거라고 지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신호가 통하지 않았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데 정혁이 미소 지었다.



‘역시.’



이번에도 신호가 통했다고 생각하며 지윤의 입꼬리가 더 말려 올라갔다.



“미안하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라. 선약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네? 아니, 이봐요.”



정혁이 그녀를 지나쳐 곧장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윤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는 지체 없이 차를 출발시켜 그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다. 

멀어지는 차 뒷모습에 지윤의 황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 대체…….”



허탈한 그녀의 표정에 곧 모욕감이 어리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표독스럽게 눈을 뜬 지윤이 곧 옆에 세워 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빠르게 시동을 건 그녀가 정혁을 뒤쫓기 시작했다.



***



정혁이 차를 세우자 신호 건너편에서 익숙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오는 걸 가만히 못 기다리겠다는 듯 곧바로 차에서 내린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까득.



그런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희민을 차 안에서 노려보며 지윤이 이를 깨물었다.




처음 한희민이라는 여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그녀가 잡지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헤어숍에서 잡지를 보고 있는데 마침 한희민 인터뷰 페이지가 나왔다. 

머리를 만져 주던 원장이 그걸 보고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 요즘 자주 나오던데 지윤 씨네 회사라 잘 알겠네요?”


“모르는 여잔데. 누군데요?”


“뭐라더라, 요즘 그 똑똑해서 성공한 여자. 뭐라고 하던데. 어쨌든 자수성가로 성공한 여성의 상징처럼 매스컴에 나오는 여자더라고요. 서민 출신인데 학력도 장난 아니고 머리도 좋다던데.”


“…….”



원장의 말에 잡지 사진 속의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니 말간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 힘든 역경 다 이겨 냈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재수 없게 느껴졌다.



“가진 거 없이 출세한 케이스라 요즘 여기저기 많이 나오던데. 나이도 어린데 벌써 거기서 과장 달았다잖아요. 초고속 승진일걸?”


“아아…….”



흥미 없다는 듯 말하고 잡지 페이지를 넘겼는데도 눈치 없이 원장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잡지를 아예 덮어 버리자 이번엔 표지에도 한희민이 실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좀 그렇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표지까지.”



피식 웃으며 하는 소리에 원장이 말했다.



“그거야 예쁘니까 그렇죠, 뭐. 사실 그냥 평범하게 생겼으면 이렇게 이슈 되지 않았을걸요? 머리 좋고 성공한 흙수저가 심지어 미인이기까지 하니까 매스컴이 딱 좋아할 만하지. 아마 조만간 TV에도 나올 거예요.”


“거긴 왜?”


“여기 오는 배우랑 같이 온 피디가 하는 말 들었는데 요즘 섭외 많이 들어가는 모양이더라고요. 원래 방송가가 그런 이슈에 가장 빠르잖아. 요즘 시대가 좋아하는 여성상이라는 거지.”



요즘 시대가 좋아하는 여성상? ……우습네.



속으로 코웃음 치고 있는데도 계속되는 원장의 말은 듣기에 거슬렸다.



“지금은 바쁘다고 다 거절한다던데 아마 얼마 못 버티고 출연할걸요? 회사에서도 홍보가 되면 내보내려고 할 거고.”


“……설마. 분수도 모르고.”


“네? 뭐라고 하셨어요?”



혼잣말처럼 내뱉은 소리를 못 들었는지 원장이 다시 물었다. 거울로 원장을 보며 생긋 웃어 줬다.



“별말 안했어요.”



아마 그때부터 한희민이라는 존재가 거슬렸던 것 같다. 잡지에서 본 그 새하얗고 작은 얼굴이 종종 떠오를 때마다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행사에서 실제로 한희민을 보게 됐다. 



그다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도 아닌데 한희민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물론 저 예쁘장한 얼굴과 여리여리한 체형이 가장 눈에 띄게 만드는 이유겠지만.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눈을 가늘이고 한희민을 보고 있는데 문태진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최지윤, 쟤 너네 회사 맞지?”



태진이 가리키는 여자가 한희민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챘지만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누구 말하는 건데?”


“저기 머리 하나로 묶고 있는 여자 있잖아. 주변에 사람들 몰려 있는.”


“누군데?”



관심 없다는 듯 하는 말에 태진이 눈을 크게 떴다.



“몰라? 요즘 장난 아니라던데.”


“모른다니까.”



태진의 말이 짜증스러워 살짝 눈을 찌푸리자 그가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굴 좋고 몸매도 좋고 거기다 머리까지 좋아서 이십 대에 출세한 여자. 한…… 한 뭐라던데 이름이. 너네 회산데도 몰라?”



칭찬을 늘어놓는 태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왜? 관심 있어?”



비꼬듯 묻는 말에 태진이 웃었다.



“나 똑똑한 여자가 취향이잖아.”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에겐 사실 취향 따지지 않고 여자라면 무조건 침대로 끌어들이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여러 번 침대로 끌어들이는 여자가 분명 고학력자인 건 맞았다.



“그래 봐야 과장이라던데.”



샴페인 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비웃음 섞어 하는 말에 태진이 입술을 휘어 올렸다.



“너 모른다더니 아네. 질투 나서 모른 척했구나?”


“질투라니? 내가? 고작 우리 회사 과장한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데 태진은 내 표정엔 관심 없다는 듯 한희민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배알이 뒤틀렸다. 어쨌든 문태진은 내 약혼자였으니까.



“아직 과장이겠지. 승진 엄청 빠르잖아.”


“언제부터 문태진이 과장 따위에 관심 가졌다고. 맨날 ‘사’ 자 붙은 애들만 끼고 다녔으면서.”



입술을 비죽이자 태진이 키들거렸다.



“쟨 걔들보다 미인이잖아.”


“하.”



코웃음을 친 뒤에 싸늘하게 그를 쳐다봤다.



“수준 떨어지게 하고 다니지 마. 만나도 급에 맞는 사람들 만나고 다니라고. 나중에 소문나서 나한테까지 피해 주지 말고.”



소리 낮춰 하는 말에 태진이 멀뚱히 시선을 던졌다. 그러더니 곧 그의 입술에 조소가 맺혔다.



“급? 우리 같은 약쟁이들보단 쟤가 인간으로서나 여자로서나 훨씬 급이 높지 않겠어?”


“입조심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말하는 거야?”



당혹감을 억누르며 노려보자 태진은 더 이죽거렸다.



“여기가 어디긴. 약쟁이들이 모인 데지. 넌 아니야?”


“문태진 너 진짜……!”


“어쨌든 나한테는 신경 끄고 너네 오빠나 잘 관리해.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태진을 노려보다가 그 말에 멈칫거렸다.



“꽤 센 약만 찾고 다니는 모양이야? 그 몸으로 빨리 죽고 싶어서 그런가……. 어쨌든 소문 단속은 너네 집안부터 잘하는 걸로.”



씩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친 태진이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못 본 척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더 걸어가던 그가 문득 멈춰 서서 돌아봤다.



“아니. 너한텐 바라던 일인가? 최한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잖아.”



웃고 있었지만 태진의 얼굴에 떠 있는 건 명백한 경멸이었다.



“…….”


“간다.”



입술을 깨무는데 한쪽 손을 슥 들어 보인 태진은 그대로 한희민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걸자 한희민이 웃었다. 

세상 어두운 면 아무것도 모르는 듯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샴페인 잔을 쥔 손에 퍼렇게 핏대가 곤두섰다.

온몸에 증오가 퍼지기 시작했다.




으득.



지윤이 이를 악물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정혁과 희민을 노려봤다. 한희민은 그때와 똑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쟤는 아직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쾅!



손으로 핸들을 세게 내려친 지윤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지윤이 분노로 어찌할 바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은 다정히 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



호텔 루프탑에 위치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정혁과 희민이 마주 앉자 직원이 샴페인과 케이크를 가져왔다. 

초가 켜진 케이크에는 생일 축하 문구가 멋지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그걸 본 희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생일 축하해.”



정혁이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는 한눈에도 고가처럼 보이는 커다란 핑크 다이아 반지가 담겨 있었다.



“내 생일 알고 있었어요?”



희민 스스로도 잊고 있던 생일이었다. 아침에 서희의 전화를 받고 그제야 깨달았지만 정혁에게 따로 말하진 않았다. 

게다가 이 반지는 특별 주문 제작 방식이기 때문에 그가 미리 의뢰를 했다는 뜻이었다.



정혁이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반지를 가리켰다.



“안쪽엔 당신 이니셜이 새겨져 있을 거야.”


“아, 정말.”



링 안에 조각된 자신의 이니셜을 본 희민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비단 값비싼 선물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닌, 제 이름까지 새겨 가며 준비한 그의 정성에 감동받아서였다.



“고마워요. 정혁 씨.”



희민이 생긋 웃으며 말하자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정혁의 얼굴에도 안도가 어렸다.



“손 내밀어 봐.”



그의 말에 희민이 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약지에 정혁이 직접 반지를 끼워 줬다.



“사이즈 때문에 이 손가락을 더 자주 만졌는데. 혹시 알고 있나?”


“그랬어요?”



희민이 눈을 둥글게 떴다. 손을 잡고 있을 때 그가 손가락 하나하나 만지는 일이 많아져 그저 습관이려니 했는데 그런 숨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제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정확하네요.”



그녀가 감탄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정혁이 반지를 끼워 준 손을 잡고 가만히 바라봤다.



“예뻐.”



그의 낮은 목소리에 희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항상 끼고 있을게요.”



희민이 다이아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하자 정혁이 근사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상당히 고민했는데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군.”



정혁이 손가락으로 희민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그의 시선이 화려하게 빛나는 반지에 닿아 있었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조용히 보던 희민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게까지 고민했어요? 난 사실 당신이 뭘 주든 좋았을 텐데. 생일을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함께 보내는 첫 번째 생일이라 특별한 걸 선물하고 싶었어. 하지만 난 선물 같은 거 스스로 고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아아…….”



지금 정혁의 표정을 보니 그가 정말 얼마나 오래 고민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주기 위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고민했을 그를 생각하니 희민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신의 그 마음이 더 기뻐요. 고마워요. 정말로.”



작게 속삭인 희민이 제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반지에 머물러 있던 정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수려한 그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영화들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이것도 영화 참고한 거였어요?”


“내 머리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한 정혁이 조금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 희민의 심장이 뛰었다. 

기본적으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지닌 서정혁이 간혹 이렇게 풋풋한 소년의 모습을 할 때마다 설레는 기분이었다.



“당신 생일은 언제예요?”



자신도 그처럼 생일을 꼭 챙겨 주고 싶은 마음에 희민이 물었다. 정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실제 생일은 모르겠어. 미국의 그 의사들이 그곳에서 고아들을 몇 명 돌봐 줬는데 나도 그중에 한 명이라 처음 그곳에 간 날이 내 생일이 됐지.”


“…….”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있을 생일조차 그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희민은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태어난 그에겐 어린 날에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던 거였다. 

코끝이 붉어지는 걸 참으며 희민이 물었다.



“그럼 그날이라도 알려 줘요.”


“11월 16일이야.”


“지났네요? 아쉽다. 미리 물어볼걸.”



희민이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정혁이 가벼이 웃으며 그녀의 미간을 손끝으로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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