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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19장(2)

안부 0 8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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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가 일듯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고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 저택 뒤쪽의 출입문을 붙잡고 여는 순간, 집 안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 끝났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데 커다란 손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 너 여기서 쓰러지면 죽어.”


“당신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보니 주치의인 정병훈 박사였다. 

침통한 표정으로 내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자신의 차로 데려가 나를 태웠다.

뒷자리에 보이지 않게 나를 눕혀 준 그가 자신의 점퍼로 내 몸을 덮었다. 그러고는 카디건을 벗어 배를 감싼 붕대 위에 댔다.



“도착할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수술 자국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단단히 누르고 있어. 알겠지?”



그대로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는 저택을 빠져나온 차는 오랜 시간 달렸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점점 마취가 풀리면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채 이를 악물고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결국은 어느 순간 의식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새까만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였다.



그 뒤로 병원이 아닌 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정 박사의 개인 소유 별장 같았다. 그곳에서 회복될 때까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는 중에도 쫓기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종종 들려오는 정 박사의 통화 소리를 들어 보면 그랬다.



“아직 들키진 않았어. 그래……. 우선 기회를 보고 있으니까 정확한 일정이 잡히면 연락할게. 최 회장이 어떤 인간인지는 잘 알고 있어.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을 때 정 박사는 날 부산항으로 데려왔다. 커다란 후드가 달린 옷으로 얼굴을 가리게 한 그가 말했다.



“우선 배로 일본까지 간 뒤에 비행기 탈 거야. 여기선 위험하니까…….”



빠르게 주변을 확인한 정 박사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으니 가급적이면 얼굴 드러내지 말고. 알았지?”



처음 최 회장의 저택에서 내 팔을 잡아 일으킬 때와 똑같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사이 더 늙은 듯한 정 박사의 얼굴을 시야를 가린 후드 너머로 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박사님이 위험해지지 않아요? 왜 이렇게까지 해서 절 도와주세요?”



내 질문에 그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 자리에서 거부하지 못하고 네 피를 뽑아낸 의사로서의 사죄라고 해 두자. 나는 돈 때문에, 그리고 최 회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어.”


“…….”



조용히 보고 있자 그가 손을 잡았다.



“가자.”



커다란 손에 잡힌 내 작은 손이 한없이 무기력하게 보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안심이 됐다. 

누군가의 손에 잡혀 끌려간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잡힌 손이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이었다.




꽤 오랜 시간에 거쳐 미국에 도착했다. 아마 최대한 안전한 경로를 이용하려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긴 시간에 걸쳐 도착한 미국에는 그의 의사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를 본 그들은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 반갑게 맞이해 줬다.



“너구나. 반가워.”



처음 만난 한국인 여자가 키를 맞춰 쭈그려 앉고는 인사했다. 인상이 선한 여자였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동안 고생 많았어.”


“…….”



말없이 여자의 눈에 담긴 동정을 보고 있는데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정 박사가 말했다.



“부탁할게.”


“걱정하지 마. 그런 패륜적인 일에서 도망친 건 잘한 거야. 이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지훈.”



정 박사의 말에 여자가 다시 날 바라봤다.



“그래. 지훈이구나. 우리가 철저히 숨겨서 이 아이 지켜 줄게.”


“그런데 넌 이제 어쩌려고?”



사람들의 걱정 담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정 박사는 피곤한 듯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분간 좀 떠돌아야 할 거 같아. 내가 여기 있으면 이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정 박사가 나에게 짧게 시선을 줬다.



“그럼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네.”


“모르겠어. 우선 살고 봐야지.”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안도,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감정이 보였다.



적어도 최 회장의 집에서 탈출하다 쓰러지던 나를 잡아 일으킬 때나, 부산항에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날 때와 같은 참담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죄책감에서 벗어난 홀가분함도 보였다. 난 그 얼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미소가 담긴 얼굴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느낀 듯한 눈빛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춰 왔다.



“너를 죽게 할 뻔해서 미안하다. 이 이상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



이젠 정 박사를 다신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복잡했다. 

그 지옥에서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보고만 있는데 그가 내 어깨를 가만히 힘주어 잡았다.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 살아남는 게 복수하는 거야. 알았지?”



살아남는 게 복수하는 것. 그의 그 말은 꺼져 가던 내 삶의 의지를 밝혀 주었다.



“네. ……꼭, 살아남을게요.”



내 대답에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날부터 복수는 내 삶의 목적이 됐다. 



최 회장이 절대 날 포기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항상 쫓기는 기분을 느꼈지만 새로운 이름으로 미국 학교에 다니면서도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수술로 인해 각성한 뇌는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복수를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미국 내에서 최대한 합법적인 루트를 이용해 돈을 긁어모았다. 뉴욕 월 스트리트는 각성한 뇌로 돈을 벌기엔 최상의 공간이었다.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한 지 2년 만에 월가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로 부상했고 그다음엔 공격적으로 기업사냥에 나섰다. 

그 뒤 몸집을 불려 AQ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그 자본을 활용해 한국의 태원그룹을 인수했다. 거기까지만 8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태원을 인수하면서 의도적으로 국내에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다. 

총수를 변태 성욕자의 미치광이 노인, 더러운 성병으로 저택 밖을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고 대외적으론 김지훈으로 활동했다.



***



“그렇게 난 살아남았어. 예전 그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김지훈으로 세양에 복수하기 위해서야.”


“…….”



희민은 정혁의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양그룹 최한준의 대체 장기인 김지훈이, 세양 전체를 잡아먹는 결과를 보이고 싶었으니까.”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던 정혁의 눈에 처음으로 살의 같은 감정이 실렸다.



“그 목적을 위해서만 살았어. 그게 지금의 나고.”



굳은 표정의 정혁을 보면서 희민이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가만히 잡았다. 

그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의 손바닥엔 땀이 맺혀 있었다.

차가워진 채 땀이 맺혀 있는 그 손이 안쓰러워 제 보드라운 손으로 감싸며 희민이 말했다.



“그래서 아이가 필요했던 거군요. 세양그룹의 모든 걸 빼앗아 물려줄 당신의 아이가.”


“……그래. 최한준은 아이를 갖지 못하니까.”



정혁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되네요.”



희민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왜 모든 걸 다 가진 남자가 거액의 임신 계약을 제안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 그의 과거를 들으니 이제야 모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살아왔고 그 복수의 완성을 위해선 아이가 필요했다.

아들의 대체품으로 태어난 사람의 자식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만드는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게 최 회장에 대한 최고의 복수일 테니까요.”


“…….”



정혁이 가만히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봤다. 희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의 그 복수를 위해선 내가 아니라, 차 실장님이 구해 온 임신 가능성이 더 높은 여자가 필요하잖아요. 왜 날 선택한 거예요? 평생 그 복수를 위해서만 살아왔으면서.”



사실을 알고 나니 왠지 슬픈 기분이 되어 희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동정과는 달랐다. 그의 삶이 안쓰러웠지만 동정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한없이 슬프고 평생 복수를 위해서만 살아왔음에도 자신을 잡고 놓지 못하는 이 남자가 애잔했다. 

왜 차 실장이 그렇게 새로운 여자에게 집착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 중요한 시기에 자신을 위해 오랜 시간을 허비한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복수보다 한희민이 소중하니까.”



정혁이 눈물이 맺혀 있는 희민을 가만히 품에 안았다.



“아이는 필요 없어. 당신만 있으면 돼.”


“하지만…….”



정혁이 뭔가 말하려는 희민을 더 단단히 안고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행복해진 게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


“…….”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그 정도로 지금 난 행복해. 복수를 위해서 살아오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그의 목소리가 희민의 귓속으로 하나하나 깊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최지윤 때문에 울고 있는 당신을 보고 그 복수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때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섬뜩한 말이 그의 진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민은 그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지윤에 대한 복수가 처음부터 자신의 일이었다는 그의 말뜻도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내 일이었어. 처음부터. 그러니까 희민아, 걱정할 것 없어. 슬퍼할 것도 없고. ……널 이렇게 울게 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거니까.’



“……해 줘요.”



희민이 정혁을 마주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자신을 망친 최지윤에 대한 분노보다, 그의 인생을 망친 최 회장 일가에 대한 분노가 그녀 안에서 끓어올랐다. 

사람의 생명 하나를 그딴 식으로 취급한 그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그 복수, 꼭 해 줘요. 정혁 씨.”



정혁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희민이 말했다.



'절대 용서 못 해.'



그 어린 남자아이의 신장을, 혈액을 뽑아 간 악마 같은 인간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혁이 자신의 복수를 이용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최지윤에게 당한 일에 대한 정혁의 분노가 그의 복수를 위한 땔감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바칠 거였다. 그의 복수를 위해서.



“그래……. 내가 복수해 줄게. 희민아.”



희민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다른 뜻으로 생각한 정혁이 그녀를 품에 단단히 안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어둡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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