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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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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이십 대에 성공한 여성. 그것이 바로 세양그룹 차장 한희민을 지칭하는 수식어였다.

그런 그녀가 나락에 빠진 건 한순간이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때 그녀에게 들어온 거액의 제안.



“그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 끝나는 건가요?”



가학적 성도착증이라는 소문만 무성한 태원그룹 서정혁의 저택에 희민은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데…….



‘벨트?’



검고 기다란 것의 정체를 깨달은 희민이 숨을 들이켰다.



“잠깐, 왜 묶는 거죠?”



태연히 다가와 손목에 벨트를 묶는 정혁을 희민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해 본 적 없어서 나도 내가 섹스 중에 어떻게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네?”

“만약 당신이 중간에 내 등을 할퀸다면 내가 당신 목을 조를 수도 있으니까.”



무감한 표정으로 섬뜩한 말을 내뱉자 희민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어렵게 찾은 상대인데, 실수로 죽여 버리면 곤란하단 뜻입니다.”






짐승 계약





#프롤로그





“계약서의 모든 조항을 천천히 읽어 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계약서를 그녀 쪽으로 내미는 여성 실장의 손가락 움직임은 건조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톱 끝을 보며 희민은 입 안의 연한 살을 지그시 물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어.’



나락에 빠진 건 한순간이었다. 

도무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지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회사를 상대로 수십억의 돈을 배상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대체 왜?



억울함에 가슴을 칠 여유도 없이 돈을 마련해야 했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모든 것은 이미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된 거였다. 

다 포기하고 감옥에서 남은 삶을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암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는 죽어 버릴 거였다.



‘하지만 그 거액을 어떻게 마련하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때 이 제안이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미친 소리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기 위해 지금 희민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였다.



계약서 위를 조용히 응시하던 희민이 시선을 들었다.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희민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흰자가 깨끗해서 연한 브라운 색의 눈동자가 더 맑은 인상을 줬다. 

보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유약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단호함이 실린 눈엔 스스로 인생을 선택해 온 사람 특유의 강단이 보였다.



“그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 끝나는 건가요?”



그 남자, 서정혁의 비서실장이라 자신을 소개한 차영주가 얇은 안경테 너머로 희민을 응시했다. 

건조한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배제되어 있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임신만이 아니라, 임신을 위하지 않은 모든 성관계가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배란일이 아닐 때에도 회장님이 원하시면 관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적나라한 설명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잘도.



희민은 여자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 갈라질 것처럼 초조했지만 이 긴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희민은 최대한 업무상의 협상을 벌이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차 실장을 응시했다.



“혹시 그 남자 섹스 중독잔가요?”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 거잖아.

미간을 좁힌 희민이 다시 입 안을 짓씹는데 문득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이로 연한 살에 상처를 낸 모양이다.



태원그룹 회장, 서정혁.



소문으로 서정혁은 저택에 갇혀 산다고 한다. 

그 이유는 괴물같이 끔찍한 외모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더러운 성병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밖에 나오지 못하고 거대한 저택에 갇혀 있는 거라고.



지독한 변태적 색마라 주기적으로 그 저택에 젊은 여자를 들여보낸 뒤 몸이고 정신이고 완전히 만신창이로 만들어서야 내보내 준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희민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슨 제물이라도 바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 제물이 자신이 될 줄도 모르고.



‘이건 미친 짓이야.’



희민의 손바닥 안에서 축축하게 땀이 고였다.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이 미친 짓을 정말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만약 자신만 생각해서 판단 내릴 수 있다면 이런 짓을 벌일 바에야 감옥을 선택할 거였다. 

적어도 그게 육체적으로는 안전할 테니까. 계약서의 모든 내용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



희민은 다시 계약서를 바라봤다.



‘이 계약은 최소한의 존엄성을 갖춘 인간의 계약이 아니야. 짐승의 계약이지.’



윤리도 도덕도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날것의 본능만을 가진 짐승의 거래.

이 거래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도 똑같은 짐승이 될 거였다. 온전한 이성을 가진 상태로는 절대 버티지 못할 테니.



희민이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사인할게요.”



정작 사인을 하는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희민은 그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그녀가 최종 사인을 하자 차 실장은 곧바로 브리프케이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안에 계약서를 넣은 차 실장이 몸을 일으켰다.



“계약금은 오늘 입금될 겁니다.”



그 말에 희민의 어깨 힘이 탁 풀렸다.



“네.”



계약금의 일부만으로도 밀린 입원비와 당분간의 병원비 역시 충분히 치르고도 남을 거였다.



……그럼 됐어.



쫓기는 짐승같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 희민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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