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를 위한 소나타 6
6. 길거리에서
"이혼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내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말이야.
불행한 채로 이렇게 살긴 싫어.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편안하게 사는 삶도 포기하기 싫고.
미선이처럼 집안을 잘 타고났으면 몰라도, 우리 집은 가난하거든.
이혼하고 얹혀살면서 갖은 구박과 눈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섹스가 그렇게 중요하니?"
"적어도 내게는 그래. 침대에서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자꾸 짜증을 부리게 되고 작은 일도 꼬투리를 잡아서 싸우고야 말거든.
욕구불만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더라고."
`차라리 내 남편하고 네 남편하고 바꾸고 싶어.`
정말 간절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진희네 거실에 걸린 그녀의 남편 사진은 내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반쯤 벗겨진 숱 없는 머리와 짤막한 팔다리를 가진 그녀의 남편은 보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웠다.
진희가 결혼했던 것은 그 남자보다는 적당히 안정된 환경이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간에 난 애인을 만들고야 말 거야.
미선인 나를 도와줄 거고. 내겐 멋진 애인을 소개해주겠지만, 너에겐 섹스를 가르쳐주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 가르쳐줄지는 나도 모르겠어.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연락하지 않으면 그만일 테니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일단 적어볼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전화기 옆의 메모지에 미선의 연락처를 휘갈겨 썼다.
나를 가르친다고?
나를 레즈비언이나 창녀로 만들 생각인가?
내가 정열을 숨기고 있다고?
내가 정말 전화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건가?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졌다.
미선이 나를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과 조금씩 꿈틀대며 고개를 드는 새로운 감각에 대한 흥분과 미선에게서 느꼈던 환멸이 정신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전화를 끝내자 남편이 졸린 눈으로 하품하며 들어섰다.
나는 최대한 남편에게서 떨어져 누웠다.
남편은 개의치 않아 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떳떳하게 바람을 피우겠다고 선언하는 진희와 미선에 대한 상념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도저히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었다.
나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베란다로 나와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뒷동의 진희네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진희네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니야. 어쩌면 걔도 나처럼 이렇게 거실에 나와서 멍하니 내 쪽을 보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겁먹고 있는 건 뭘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거지.
잠깐이었지만 미선의 짜릿했던 그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성(性)에 눈뜨는 것을 무서워하는 건 아닐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결국 밤을 새워 내린 결론은, 절대로 미선에게 연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속에 도사린 욕망을 싹둑 잘라내 버려야 했다.
그것은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 주었던 죄악이었고 어둠의 씨앗이었다.
불행히도 남편과의 섹스는 고통뿐이었지만 어떻게든 나는 그것을 감수해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견디기가 힘겨워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은연중에 꿈꾸었던 자살을 기억해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에게 좀 더 대범하게 내 의사를 관철할 용기도 없었고 내 삶의 행로를 바꿀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선에게 거지처럼 손을 벌려 동정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은 곧 내 인생이 파멸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게는 요조숙녀다운 도도한 자태를 유지하며 정결한 결혼 생활을 지속할 의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미선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다면 난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섹스 따위야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어.
남편은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는 높다란 빌딩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을 준비했다.
남편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갔을 때는 이미 가벼운 아침 식사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가 토스트와 우유를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의미 없는 미소를 생긋 지어 보였다.
또 다른 모습의 유리 가면이 내 얼굴 위에 덧씌워지는 순간이었다.
`넌 너 스스로 만든 유리성에 갇혀 있는 거야.`
미선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난 이렇게 다양한 유리 가면을 쓰면서 유리로 만든 위태위태한 성에서 살고 있어.
그것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너처럼 천박한 여자는 절대로 내 삶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이렇게 살다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지면 깨끗하게 물러날 거야.
내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정말 정숙한 아내가 죽었다며 애도해 줄 거야.
그게 뭐가 잘못된 생각이야?
나는 절대로 이 유리성을 부수지 못해.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면서도 나는 혼자 수만 가지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러다가 난 정말 머지않아 미쳐버릴 거야. 아니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지도.`
엄마.
그래. 엄마를 만나면 좀 나아질지도 몰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어머니의 단아한 얼굴을 보면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정돈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준비하고 전철을 타기 위해 종종걸음을 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와 같은 질감의 부드러운 재킷을 걸쳤다.
혹시 몰라서 얌전한 디자인의 팬티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하나같이 모두 친정어머니가 보면 기절할 정도로 현란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었다.
괜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에 팬티 하나 입지 않았다고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철의 가파른 계단에서도 무릎길이 정도의 스커트 속이 보일 리는 만무했다.
정 마음이 켕기면 친정집에 도착해서 근처의 아무 곳에서나 싸구려 팬티를 사 입으면 그만이었다.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만원 전철 안이었다.
때마침 출근 시간에 맞물려서 전철 안은 직장인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과연 사람들이 지하철이 아닌 지옥철로 부르는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여자들의 진한 향수 냄새와 저마다 사람들이 내뿜는 후끈한 입김이 어우러진 전철 안에서는, 웅웅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돌아가는 에어컨도 소용이 없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고 있었다.
좀 더 늦게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부질없었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서 어느새인가 나는 전철 마지막 칸의 맨 끝 벽에 몰아붙여져 있었다.
가슴이 차가운 금속 벽에 밀착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등을 돌리고 벽에 밀려진 것이 더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는 꼼지락거리면서 최대한 벽에 바짝 붙었다.
뭔지 모를 불쾌감이 엉덩이 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환승역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서로 밀고 당기며 서둘러내렷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