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12장. 제 3의 살인 1
서울역 탑시계가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밤이 되겠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가죽 점퍼에 두 손을 찌른 채 느릿느릿 대합실로 걸어 들어갔다.
영하의 강추위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는 경부선 새마을호 매표구 앞으로 걸어갔다.
무궁화의 침대칸을 끊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잘 생각이었으나 얼핏 보았지만 상당한 미인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를 서울역 대합실에서 또 본 것이다.
우연치고 기묘한 우연이었다.
여자가 부산행 표를 하나 끊어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부산 하나 주시오. 방금 그 여자 옆자리로..."
제복의 계원이 그를 홀깃 쳐다보았다.
"수사상 필요해요."
족제비 박재만은 재빨리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 대답했다.
왜 갑자기 여자의 옆자리를 부탁했는지, 어떻게 수사상 필요하다는 거짓말이 튀어나왔는지 그는 자신도 이해할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계원이 황급히 표를 내주었다.
그는 주머니에 쑤셔 놓고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개찰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둥근테의 안경을 쓰고 파마 머리가 풍성했다.
옷차림은 검은색 니트에 검은색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상당히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여자였다.
(무엇을 하는 여자일까...)
저런 여자를 유혹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는 공연히 여자의 옆자리를 끊었다는 후회가 일었다.
여자의 옆자리를 원한 그 이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접근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내 개찰이 시작되었으나 족제비는 개찰이 시작되고 나서도 10분쯤 지나서 개찰을 하고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여승무원의 안내로 열차에 오르자 여자는 이미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여자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열차는 15분후에야 출발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여자를 유혹하는 것은 번외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 복수에 미쳐 날뛰고 있는 여자로부터 도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철구가 죽고 김인필이 죽음을 당한 이상 그라고 해서 안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경찰의 조사를 받고 풀려난 양마담이 그에게 쪽지를 보내 당분간 피해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부산에 한두달간 피해 있으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며 경찰이 이미 미행하고 있으니 자신을 찾아오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양마담의 쪽지를 보고 비로서 강철구와 김인필이 죽은 까닭을 이해했다.
그것은 그들의 폭풍이 불던 밤에 거여동에서 윤간했던 여자의 복수였다.
양마담이 조사를 받을 정도면 경찰도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것은 강철구와 김인필을 죽인 여자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일 것이다.
당분간 피해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지른 사건은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살인 사건이 아닌 이상 경찰이 기를 쓰고 그를 체포해 버리면 여자는 재판을 받고 사형대로 끌려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다소 안심되었다.
열차가 대전을 지날 무렵 그는 눈을 떴다.
그는 차창으로 흘러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내려다 보았다.
여자는 자고 있는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차창으로 흘러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면서 폭풍이 불던 밤에 거여동에서 젊은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을 윤간하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는 양마담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그는 지금도 이행할수 없었다.
양마담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3백만원을 받고 그 일을 할 것이냐 안 할것이냐만 그에게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3백만원을 선택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현금 3백만원 그 일을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집주인인 사내를 묶어 놓고 딸과 여자만 발가벗겨서 그짓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세 번째로 여자를 폭행했다.
첫 번째는 강철구가 했고 두 번째는 망치인 김인필이 했다.
세 번째가 그의 차례였다.
그가 바지를 벗고 여자의 몸위에 바짝 엎드려 그짓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여자의 가랭이는 두놈이 배설해 놓은 정액으로 미끌미끌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달려들어 끝내 그 짓을 하고 말았다.
그는 그때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았다.
무론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그런 바닥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자는 다만 남자의 욕망을 받아주는 여자들도 사창가의 여와 호스테스, 그리고 춤바람난 여자들뿐이었다.
그러나 거여동에서 집단으로 그짓을 한 여자들은 그런 여자들이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 그 여자들의 울부짖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오는 것이었다.
족제비는 또 다시 차창에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폭풍이 불던 밤에 그들이 윤간했던 젊은 여자와 용모가 비슷했다.
족제비는 이상하게 그 젊은 여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발버둥치며 울부짖던 여자의 얼굴이 어두운 꿈 속의 일인 듯 희미하게 떠오르곤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희고 매끄러운 다리...
검은 옷의 여자가 눈을 뜨더니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를 흘깃 쳐다보더니 방긋 웃었다.
"저...담배 한 대 피워도 괜찮을까요?"
여자가 사냥하게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아, 예..."
족제비는 당황하여 재빨리 대답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그에게 양해를 구한다것도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다.
여자가 또 다시 방긋 웃더니 앙징맞게 생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매우 익숙한 솜씨였다.
여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족제비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려 반대편 차창을 응시했다.
열차는 어느덧 추풍령의 가파른 고갯길을 쉬엄쉬엄 오르고 있었다.
차창으로 깍아지근 듯한 산협이 지나가는가 하면 잿빛 구름 덩어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물러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