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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욕망의 포효 12

복숭아 0 11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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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준의 차가운 한마디에 진선이 떨어졌다. 그녀가 한발 물러서자 효준은 돌아서서 냉담한 눈길로 진선을 응시했다.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당신이 내 아내라고 당당하게 말할 양심이 있냐고! 다른 놈하고 더럽게 놀다가 배 속 아이까지 잃어버린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효준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자 진선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효, 효준 씨…….”


“내가 이 말을 아버님께 직접 하길 바라? 유부남하고 놀아나다가 그 부인한테 걸려 온갖 수치와 망신을 감수해야 했던 내 입장을 알면 아버님은 뭐라고 하실까? 끝까지 당신을 옹호하실까? 당신 손자가 이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버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이럴 거야?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또 그 소리야? 당신 목숨이 나한테 무슨 큰 의미라도 있는 줄 알아? 착각하지 마. 지금은 당신이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그 협박이 나한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 마. 돌아가!”


심장을 산산 조각내는 냉랭한 효준의 말에 진선은 부들부들 떨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아이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발이 손이 되게 빌었고, 무릎도 꿇고 잘못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받아주지 않았고 도리어 이혼을 요구했다. 

끔찍하다고, 살이 닿는 것도 싫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죽기보다 싫다고 말하는 그에게 정이 떨어져서 이혼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는 너무도 잔인했다.


“살아있는 나보다 점밖에 되지 않았던 그 씨앗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뭐?”


“내가 왜 그랬는데? 당신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줬으면 그랬을까? 언제나 일, 일, 일! 일밖에 모르면서 날 외롭게 했잖아. 언제 나하고 손잡고 산책이라도 한 적 있어? 외식은 몇 번 했어? 외식할 때도 연실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못했어. 당신은 나한테 뭘 잘했는데? 남편으로서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나만 나쁜 년이야? 내가 원인 제공 했냐고.”


“그게 바람피우고, 생명을 잃은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이성적이고 양심이 없는 여자네. 그 씨앗? 자식을 씨앗이라고 표현하는 당신은 부모가 될 자격이 없네.”


“왜 나만 괴롭고 당신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내가 그 여자하고 당신이 잘되도록 둘 것 같아?”


“당신이 멋대로 나대도록 난 가만히 둘까?”


“어쩔 건데?”


진선이 대들었다. 이미 효준의 마음은 싸늘해져 있었다. 자신의 핏줄을 씨앗이라고 표현한 그녀에게는 조금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당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치게 해야지. 내가 얼마나 잘할지 의심이 되지도 않지? 약점으로 따지면 당신이 나보다 훨씬 많고, 배경으로 봐도 치명타는 나보단 당신 가문이 더할 테니까.”


“비열한 자식!”


“그러니까 미련 두지 말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이미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고.”


진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을 바라보는 효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담했다. 

진선은 이를 갈듯 입술을 깨물고는 급히 뛰어나갔다. 


효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8년을 함께 한 여자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진선이었다. 

다른 짓 하지 못하도록 경고할 필요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마구 휘젓고는 맥주를 마셨다.


***


집안에는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희수가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해서 휘석이 고기를 사서 집에 와서 굽는 중이었다. 

편하게 먹고 싶다는 희수의 말에 식당이 아닌 집에서 먹기로 한 것이다. 


휘석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희수는 샤워하고 나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식사를 준비하는 휘석을 바라보며 희수는 입술을 살며시 만졌다. 


효준의 입술이 닿은 입술은 아직도 얼얼한 것 같았다. 

아픔이 짙게 묻은 키스였다. 

아무 의미 없는 키스였다. 그런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효준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가 생각났다.


“다 됐어. 앉아.”


휘석의 말에 정신 차린 희수는 식탁으로 와서 의자에 앉았다.


“냄새 좋다. 고생했어.”


“많이 먹어.”


“휘석아.”


“먹고 얘기하자. 어서 먹어.”


맛깔스럽게 구운 삼겹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수는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보다는 기운이 없었다. 기운을 차리려면 고기를 먹어야 했다. 

기름장에도 찍어서 먹고, 쌈에 싸서도 먹는 희수는 휘석을 챙길 생각을 못 했다. 

그런 희수를 보고 있는 휘석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효준과 문제가 있는 것일 텐데, 그래서 더 힘들어하는 것일 거다.


“밥 줄까?”


“응.”


“된장찌개도 끓였어.”


“좋지.”


휘석은 식탁 중앙에 된장찌개 냄비를 놓고 밥을 퍼서 희수 앞에 놓았다.


“넌 왜 안 먹어?”


“이제야 챙기는 거냐? 혼자 먹으니까 맛있어?”


“어서 먹어. 밥 먹고 술 한잔할 거야.”


“그래, 그래. 뭐든 다 먹어라. 먹고 기운만 차림 되지 뭐.”


휘석도 먹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맛있게 먹는 희수를 보면서 말이다. 

일단 먹여놓고 무슨 얘기든 들어야 했다. 

조금씩 얼굴에 생기가 도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밥을 다 먹고 휘석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안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휘석이 촬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얘기했다. 

들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희수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네가 얘기해 봐.”


휘석이 말에 희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오늘 왜 그렇게 힘들어한 거야?”


희수는 대답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머리는 왜 자른 거야? 힘들었어? 아니면 윤효준한테 보여주려고 잘랐어? 윤효준은 뭐래?”


“어색하고 낯설지만 나쁘지 않대.”


“미친놈. 그 자식이 힘들게 해?”


“으응.”


“뭐?”


“이혼했더라.”


“이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내한테 있나 봐.”


“그런 말을 해?”


“아니. 장인이라는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 얘기하는 걸 얼핏 들었어. 힘들어 보였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희수를 보는 휘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 걸까?


“동정해?”


“동정?”


“힘들어 보이는 윤효준을 동정하느냐고. 마음이 흔들려? 위로해주고 싶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


“미쳤어?”


“네가 미친 건 아닌지 생각해봐. 그 자식 때문에 왜 힘들어? 그 자식은 그 자식이고 넌 너야. 각자 인생 살면 되는데 뭐가 힘들어서 축 처져?”


펄펄 뛰는 휘석을 보던 희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효준은 윤효준의 인생을 살고,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효준이 자꾸 자극하는 것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윤효준과 키스했다고 하면 더 펄펄 뛸 휘석이라 말할 수 없었다.


“야! 네가 내 오빠야? 아빠야? 우린 그냥 친구야. 왜 자꾸 야단을 쳐?”


희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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