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포효 9
“녹차입니다.”
“고마워. 청음 실무에 관해서는 모르지?”
“모릅니다.”
“프랑스에도 청음이 있어. 그곳과 이곳의 매출 현황을 익히도록 해. 내가 가는 곳은 따라나서도록 하고. 자료실에 가면 5년 동안의 청음 매출표 모아둔 것이 있을 거야. 정리해서 노트북에 있는 현황과 맞는지 비교해서 누락 된 것이 있으면 제대로 해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효준이 빤히 쳐다보자 희수가 왜 그러냐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나쁘진 않은데 어색하군. 적응하려면 며칠 걸리겠어.”
“그럼 일 시작하겠습니다.”
“응.”
희수가 자리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켜고 파일을 클릭하는 것 같은데 우왕좌왕하는 것 같았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혼자 익히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노트북에 필요한 것들은 전부 깔아놓았으니까 그녀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효준도 노트북을 켜고 오늘 예약 상황을 체크했다.
셰프 추천메뉴와 사이드메뉴도 확인했다. 수정할 것들이 없어서 신메뉴 사이트로 넘어갔다.
효준이 일에 빠져 정신없을 때 희수는 노트북 파일을 이것저것 클릭하면서 매출 현황을 찾았다.
매출 현황표가 너무 많아서 파악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5년 동안의 매출 현황도 찾아보니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책상에 앉긴 했지만, 음식 만들고, 데코레이션 하던 자신이 이곳에서 뭘 해낼 수 있을지,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효준이 들어왔을 때 묘하게 안도감이 일었다.
그가 반갑다거나 함께 일하게 되어서 좋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너무 싫었다. 다만 이 낯선 공간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안심이었다.
대표실은 상당히 넓었다. 탕비실도 있었고, 문을 열면 자료들을 정리해놓은 자료실도 있었다.
노트북을 들여다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좀이 쑤시고 주방에 가서 요리하고 싶었다.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건 포기하고 자료실로 들어왔다.
잘 정리되어 있긴 했지만, 어디를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 암담했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데 자료실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효준이 들어왔다.
“왜요?”
“뭐가?”
“왜 들어오냐고요.”
“자료 찾으러.”
“네?”
“왜 그러는데? 무슨 상상을 했는데?”
“사, 상상이라니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라도 할까 봐?”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아요.”
“그럼 됐네. 이곳은 당신만 들락거리는 전용 자료실이 아니야.”
희수는 샐쭉해져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효준은 한번 휘둘러보고는 찾던 자료를 집어 들었다. 희수가 멀뚱히 서 있자 효준이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이 찾는 자료는 저기 있는데?”
그가 가리키는 곳은 높은 곳이었다. 희수는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쪽으로 가서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서 팔을 쭉 늘여보는데도 힘들었다. 그때 등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놀라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효준이 몸으로 눌러서 그럴 수가 없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그의 몸이 더욱 바짝 그녀의 등 뒤를 눌렀다. 희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허튼짓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료를 꺼내려고 한다는 건 알지만 그의 키에 이렇게까지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 이상했다.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희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부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기억이 났다. 손으로 그리듯이 그의 육체를 만졌다.
그만 바라보면서 두 눈에 그를 새겼다. 몸으로 그의 몸을 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어떻게 안아주었는지, 어떤 식으로 보듬어주었는지 고스란히 기억이 났다.
마치 기억하라는 듯이 그의 몸이 밀착되었다.
신경이 옥죄었다. 8년 동안 여성 본능이 죽은 것처럼 살았다. 기본적인 먹고, 자는 본능에만 충실했다.
남자라고는 효준밖에 없었기에 배신 후, 연애 세포가 죽었다. 그런데 그의 몸이 닿는 순간 온몸이 긴장하면서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짜릿함이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윤효준이었다.
이성은 이렇게 외쳤지만, 발가락 끝에서부터 위로 묘한 느낌이 치고 올라왔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고 이상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제대로 숨을 못 쉬고 있는데 그가 떨어졌다.
희수가 몸을 홱 돌려 노려보는데 그가 서류철을 내밀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의자라도 갖다 놓도록 해. 매번 내가 꺼내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밀착할 필요가 있었어요? 당신 키면 수월하게 꺼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맞아. 일부러 밀착시킨 거야. 그러고 싶어서.”
“뭐라고요? 지금 날 희롱하는 거예요?”
“키스하고 싶어.”
“뭐라고요?”
“가슴도 만지고 싶고.”
“윤효준 씨!”
“안고 싶어.”
“이 사람이 정말…….”
“자고 싶어.”
효준이 다가서며 말하자 희수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저돌적인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가까이 오지 마요.”
“걱정하지 마. 내가 당신을 함부로 다룰 일은 없어. 오늘은 여기까지. 당신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
“미, 미친놈…….”
“하하하하. 당신 여전히 예쁘고 귀여워.”
그가 웃으면서 자료실을 나갔다. 순간 긴장했던 그녀는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뻔뻔한 건지, 파렴치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 정말 나쁜 놈이었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려는 것 같아서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원수 같은 놈이었다.
평생 안 보고 싶은 인간이었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움직일 수만 있었으면 그를 밀쳐냈을 것이다. 익숙함이란 것이 무서운 걸까?
희수는 입술이 마른 것 같아서 혀로 핥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너무 오래 있으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있는 힘을 짜내 일어나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의자에 앉아 서류철에 눈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자도, 숫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마. 저 인간은 날 아프게 한 남자야. 익숙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익숙함을 버려. 다시 한 번 그딴 짓을 하면 죽여 버리겠어.’
속으로 생각하는 희수는 이미 모든 회로가 정지된 상태였다. 효준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멍해 있었다.
***
“대표님.”
일하던 효준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봤다. 성 실장이 서 있었다.
“뭐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담운이었다. 뜻밖인 효준은 놀란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내가 누군지는 잊지 않은 모양이군. 마실 거 따위는 필요 없네.”
담운이 소파에 앉는 걸 보고 효준은 성 실장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성 실장이 나가고 대표실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희수는 점심시간이라 나가서 자리에 없었다.
“앉지 않고 뭐 하나?”
효준은 소파에 앉아 담운을 응시했다. 만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만나고 쉽지 않았다.
8년간의 결혼 생활을 설명하기도 싫었고, 진선의 파렴치한 행동에 관해서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