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포효 36
“서윤 씨?”
“네.”
“나 좋아해요?”
서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휘석을 응시했다.
2
휘석은 한강이 훤히 보이는 커피전문점으로 서윤을 데리고 왔다.
2층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서윤을 바라보는 휘석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던 서윤이 휘석을 쳐다봤다.
“왜요?”
“대답 기다리고 있는데.”
“으음.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걸까요?”
“왜 이상한 여자가 됩니까?”
휘석이 그 얘기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서윤은 민망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싹 잡아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아할 만한 일이 없었잖아요. 일할 때마다 으르렁거리기 바빴잖아요. 그런데 정말 오늘 왜 그런 거예요? 정말로 당황했어요.”
“자꾸 삼천포로 빠질 겁니까?”
“호, 호감이에요.”
“언제부터요?”
언제부터더라? 서윤은 커피를 마시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 휘석을 눈여겨본 것은 2년 전 그날이었을 거다.
“휘석 씨 처음 봤던 날이요. 휠체어 타고 청음 품평회 왔었죠? 윤 대표님과 강 셰프님 축하해주던 날이요.”
“그때라고요?”
“사람 괜찮다고 생각했었죠.”
“외모가 괜찮다?”
“그렇죠. 그러다가 그 자식하고 사귀게 되었고, 1년 지났어요. 그런데 양다리 걸쳤던 것이 들통난 거고요. 난 한 번 배신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할 수 있거든요.”
휘석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효준과 희수를 떠올렸다.
한 번 배신했던 효준은 지금 완전히 희수의 손아귀에 잡혀서 행복함에 빠져 있었다. 공주까지 봐서 완전 딸바보가 따로 없었다.
“모든 배신자가 그렇진 않아요.”
“물론 그렇겠죠.”
“나 아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출세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었죠. 그런데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불행은 닥쳤고 그래서 이혼했죠. 그리고 그 남자는 사랑하던 여자를 찾았어요. 어떻게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 여자의 마음을 다시 얻었어요. 지금은 아기도 낳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어요. 과연 그 사람의 행복이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할까요? 속으로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잖아요.”
“서윤 씨가 보기에 희수가 행복한 척하는 것 같습니까?”
서윤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강희수 이름이 왜 나오는 건가. 의아하던 중에 배신했던 남자가 윤효준이고, 배신당했던 여자가 강희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윤효준 대표와 강희수 셰프의 얘기에요?”
“아는 척하지 마요.”
놀란 서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에게서는 불행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봐도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도 배신하고 돌아온 윤 대표를 색안경 끼고 봤어요. 희수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요. 그런데 흔들리더군요. 희수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윤 씨가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철저하게 버림받고 힘들어하던 희수를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자식의 콧대를 꺾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 호감 있다고 한 말도 혹시 날 강희수 씨와 겹쳐봐서 그런 거예요?”
“무슨 말이에요?”
“강희수 씨를 좋아했던 거냐고요.”
휘석은 커피를 마시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서윤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했죠. 지금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희수는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은 없어요.”
“아!”
“좋은 친구였을 뿐이에요. 어쩌면 동생 같았을 수도 있겠네요.”
“네에.”
“서윤 씨는 내게 여자예요.”
“네?”
“여자로서 호감 있는 거라고요.”
“호감 있다는 말이 진심이었다고요?”
“그런데 난 의심스럽지 않아요? 난 임서윤 씨가 한신그룹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그 호감도가 그 조건 때문에 생긴 거예요?”
서윤은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물론 휘석이 그런 속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직접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단지 호감이 있다고 했을 뿐이지, 서윤 씨와 뭘 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서윤 씨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고요.”
“참 애매한 말이네요.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기겠다는 거예요?”
“나하고 뭐든 하고 싶어요?”
솔직히 오늘 친구들한테 어깨가 으쓱했다.
특히 그 인간 말종 같은 놈 앞에서 체면이 서서 기분이 좋았다.
휘석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줘서 좋았고, 고마웠다.
그런데 호감이 있다고 하면서 한 발 뒤로 뺐다.
이 상황에서 그와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용기 낸다면 어떨지 몰라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서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15일이 지났다. 요즘 휘석은 휴대폰을 끼고 사는 것이 일이었다.
자꾸만 서윤의 전화가 기다려졌다.
서윤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한 후로 그녀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꼈다는데 휘석은 그때가 기억나지 않았다.
왜 서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었는지 몰랐는데 희수 때문이었던 것 같다.
희수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걸 전부 봤으니 서윤이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 같다.
조건을 노리는 그 망할 인간과 똑같은 취급을 하는 걸까? 그래서 연락하지 않는 걸까? 궁금함과 불쾌함이 동시에 들었다.
드라이브하면서 사진 좀 찍으려고 장비 들고 움직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보는데 희수 전화였다.
“여보세요?”
[나야.]
“응.”
[어디야?]
“집. 이제 나가려고.”
[서윤 씨 말이야. 지금 병원에 있대.]
“응? 병원? 왜?”
[낮에 전에 왔던 친구가 밥 먹으러 와서 말하는데, 전에 서윤 씨 뺨 때렸던 남자 말이야.]
“응.”
[ 그 사람이 너 가만 안 두겠다고 서윤 씨 윽박질렀나 봐. 그랬더니 서윤 씨가 너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대. 뺨 때린 거, CCTV 증거로 고소하겠다고 맞받아쳤나 봐. 너한테 손톱만큼이라도 피해 주면 그 사람 인생도 종 치게 하겠다고. 사귀면서 양다리 걸친 사실 동문들에게 다 퍼트리겠다고. 여자 만날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상대 여자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까발려주겠다고, 죽기 살기로 덤볐대. 그러고 헤어져서 집에 가는데 세상에, 그 남자가 뒤에서 차로 박았단다.]
“뭐? 박아?”
[세게 박았나 봐. 가슴이 핸들에 부딪혀서 쇄골 골절도 되고 목도 삐끗해서 심각하다더라고. 지금도 깁스한 채로 병원에 있대.]
“어디 병원이야?”
[문자로 병동하고 호실도 찍어줄게.]
“응. 끊자.”
전화를 끊은 휘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저것 재느라고 연락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자신 보호하려다가 다쳐서 병원에 들어갔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시 후에 문자가 왔다.
그는 바로 집을 나서서 병원으로 향했다.
얼마나 다친 건지, 그 자식을 어떻게 요절을 내야 할지 어금니 꽉 깨물고 운전했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병실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1인실로 <임서윤>이라는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똑똑. 그는 심호흡을 하고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휘석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휘석 씨.”
휘석을 본 서윤이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는 간병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 자리 좀 비켜주세요.”
“네. 필요하면 전화해요.”
간병인이 나가자 휘석이 서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