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가랑] 오빠의 노예 - 2
“우리 아들은 아무래도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안 회장은 태생이 외로운 아들이 꼭 제짝을 찾아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전에 마음을 열어야 할 텐데 영아의 결혼 소식이 과연 촉진제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안 회장은 아들의 마음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살살 긁어서 반응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안 회장은 아직도 태욱이 어려웠고,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태욱은 그녀에게 아들로서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이제 안 회장은 그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이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을 날이 오기를 바랐다.
1. 두려움의 정체
띠리리, 띠리리.
공동 현관문의 멜로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막 사과를 깎고 있던 영아는 깜짝 놀라 예리한 과일칼 날에 검지를 베였다.
“앗!”
진후가 다가와서 검지를 살폈다.
“이런, 피가 나잖아. 잠깐 있어. 근데 안 나가 봐도 돼?”
밴드를 찾아와서 손에 붙여 주면서 진후가 신경 쓰이는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글쎄. 고민이야. 이대로 없는 척할까, 아니면 뭘 좀 보여줘야 하나?”
하지만 영아의 짓궂은 표정은 눈동자 속의 두려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태욱을 감내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길든 상태였다.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태욱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녀 또한 심장이 먼저 제 주인을 알아보고 미쳐 날뛴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의 대단한 도발이 그를 얼마나 자극했는지 잘 아니 더 겁이 나는 거였다.
“뭘 좀 보여줘야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줘야겠지?”
영아는 그렇게 해달라고 대답하려다 톡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문 열어. 이야기 좀 하자. 단둘이.]
누가 있다면 당장 내보내고, 밖이면 바로 오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있다는 것은 전화를 하지 않고 톡으로만 보낸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는 극도로 흥분했을 때 말을 아꼈다.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못 견뎌 하는 태욱이었다.
침대에서는 예외였지만 그건 몹시 사적인 영역이라 그와 몸을 섞었던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비밀을 영아는 알게 되었고, 그건 영원히 음지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극비였다.
그게 바로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코 시작해서는 안 되는 관계가 너무 좋았다는 것. 더구나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누려서는 안 되는 즐거움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도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수렁 속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시작했다.
최면에 빠진 듯이 합리적인 생각이나 결론 따위는 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어려서 핑크빛으로만 보였던 사랑의 실체가 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아 버렸다.
정확히 1년 전이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질질 끌려다녔고, 그런 자신한테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구원자처럼 진후가 나타났을 때 드디어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곁에 도와주겠다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태욱과 대면하기 전이고, 이렇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와 맞설 생각을 하니 역시나 작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
후가 도와준다고 해도 어쩌면 그래서 더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망설여졌다.
“진후 씨, 오늘은 그만 가고, 일단 오빠와 단둘이 상황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진후 씨가 곁에 있으면 오빠는 아예 들을 생각을 안 할지도 몰라.”
태욱이 가장 못 참는 것이 그의 영역 침범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아직 자신의 영역이니 다른 남자의 접근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1년 전에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그는 다른 남자한테 쿨하게 보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집착일까, 오기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알아 온 탓에 너무 편안해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걸까?
그 이유가 뭐가 됐든지 영아는 더 이상 그에게 끌려다닐 수 없었다.
그와의 이 건전하지 못한 자기 파괴적인 관계는 인생을 좀먹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혼자서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극복해야지. 이제 나도 어른이니까,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지.”
영아는 심호흡을 한 후 공동 현관문 버튼을 열었다.
“진후 씨는 이제 가봐.”
“정말 괜찮겠어?”
진후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영아는 애써 미소 지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설마 잡아먹기야 하겠어?”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실은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그에게 영아는 손쉬운 먹잇감이었고, 그 사실은 그도 그녀도 너무나 잘 알았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거부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1년 동안 아슬아슬했지만 그걸 해냈고, 앞으로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고, 그도 그 분명한 사실만큼은 인정한 바였다.
그 종지부가 결혼 발표였고, 그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지금껏 그녀가 그의 편리한 욕구를 해결해 줬던 대가에 최소한의 배려심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단순히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누렸던 쾌락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그처럼 성욕으로만 이용한 게 아니라 그녀는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평생 몰라도 그녀는 일찍이 다 알았다. 차이가 있다면 바로 그거였다.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은 있고?”
“솔직히 자신은 없어. 하지만 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기를 끌어모아 밀어내야겠지.”
영아의 씁쓸하다 못해 슬픈 표정을 보던 진후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신세와 비슷한 그녀의 신세가 안쓰러운 모양이다.
두 사람 다 빠져서는 안 되는 상대한테 늪처럼 끌려들어 가는 서로를 구제해 주고자 만났으니까.
그 절절한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진후였다.
“그럼 나 간다. 전화할게.”
“내가 할게.”
태욱이 언제 갈지 모르는데 굳이 다른 남자 전화까지 받아서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를 상대하다 보면 얼마나 기가 빠질지 모르니까.
언제쯤이면 그의 곁에서 초연할 수 있을 것인지 과연 그럴 날이 올까 싶은 게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진후가 가고 난 후 태욱이 올라왔다.
미리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영아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태욱이라는 것을 알고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곧 태욱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정장 속에 19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 탄탄한 피지컬과 더불어 슬림하고 매끄러운 그의 얼굴 윤곽이 신비한 품격을 물씬 풍겼다.
성큼 다가온 그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작은 얼굴에 선이 고운 눈매,
지적인 느낌의 콧대와는 대조적으로 섹시한 여성미를 뽐내는 붉은 입술을 찬찬히 훑었다.
그의 눈동자 속 뜨거운 열기는 그녀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게끔 바짝 긴장시켰다.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는데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살짝 걸친 듯 가벼운 압력이었지만 그의 체온이 영아의 뼛속 깊이 스며들어 불을 지피는 듯 피가 끓어올랐다.
쾅!
그가 그녀를 밀고 들어오면서 문을 닫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잠시 얼이 빠진 듯 그를 보고 있던 영아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벽면으로 밀어붙이며 꼼짝도 못 하게 잡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길로 그를 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는 여전히 영아에게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하얀 셔츠 단추를 풀어 젖힌 사이로 가슴 골짜기를 보더니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결혼한다고?”
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는 그녀가 큰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겁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봤자, 키 차이가 30cm 가까이 나서 우습게만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