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4장. 흉가의 여인 2
이튿날 아침 보옥은 백석으로 남편의 묘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새워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백석 공원묘지 입구에서 국화꽃 두 묶음을 사서 남편과 딸의 무덤 앞에 놓고 남편의 무덤을 향해 꿇어앉았다.
비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그녀는 남편의 무덤 앞에 엎드려 산 사람에게 속삭이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간밤에 자신이 본 것이 귀신이라면 남편과 딸의 억울한 영혼도 자신을 도와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귀신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딸의 무덤을 찾아온 것도 그것이 귀신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보옥은 두 시간 남짓 남편과 딸의 무덤 앞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또다시 후회되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남편과 딸이 죽은 뒤에 그녀에게 가해져 오고 있는 무형의 압력을 그녀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그것과 싸워야 했다.
물론 경찰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킨 적들을 처단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또 올게요.)
그녀는 남편의 무덤을 향해 속삭였다.
(잘 있어. 윤미야...)
윤미의 무덤엔 머리를 쓰다듬듯이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보옥은 백석 공원묘지 앞 큰길까지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비를 흠뻑 맞아 소복이 그녀의 몸에 감겼다. 그녀는 택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빈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30분 남짓을 기다리자 마침내 중형 택시 한 대가 그녀의 앞에 와서 섰다.
"서울 송파구 거여동까지 가시겠어요?"
"그러시죠."
택시 기사가 그녀의 몸을 힐끔 살피고 선선히 승낙했다. 소복이 몸에 감겨 그녀의 알몸이 그대로 내비칠 듯 드러나 보였다.
"땀내 나는 수건이지만 좀 닦으시겠어요?"
택시 기사가 수건을 뒤로 넘겼다. 말과는 달리 깨끗한 수건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수건으로 대충 빗물을 닦은 뒤 택시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초로의 사내였다.
백석에서 거여동까지는 거반 두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남편의 시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시동생은 두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병실에 누워 있었다.
"형수님!"
시동생이 그녀를 발견하고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거렸다.
"괜찮아요, 누워 있어요."
그녀는 재빨리 시동생을 제지했다.
"그런 일을 당하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하고..."
시동생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동안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속을 너무 많이 썩여 드렸죠. 사업을 한답시고. 형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신 분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 마세요.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어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봐주고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제가 돌볼게요. 그래도 괜찮죠?"
"형수님이 돌봐 주시면 제가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빨리 완쾌하실 걱정이나 하세요."
그녀는 나약한 시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병원비도 밀려 있고..."
"제가 지급할게요.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늘 폐만 끼쳐서."
"우리가 어디 남이에요?"
그녀는 사양하는 시동생의 손에 우선 병원에서 쓰라고 봉투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동생의 집을 찾아갔다.
집안은 여자가 없어서인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치워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 수고하셨어요."
그녀는 할머니에게 수고비를 약간 건네주었다.
할머니는 이웃에서 무슨 돈을 받느냐며 사양했으나 그녀는 억지로 떠맡겼다.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갈게요."
"얘들 아버지가 뭐라고 할지."
할머니가 난처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병원에서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제가 애들 큰엄마예요."
"예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아이들을 씻기고 시장에 나가 옷을 한 벌씩 사 입혔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사 먹인 뒤 친정으로 데리고 갔다.
"웬 애들이냐?"
어머니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당분간만 데리고 계세요."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는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밤이면 유리창이 깨지고 고양이가 나타나는 흉가 같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네가 키울 셈이냐?"
어머니는 그것만 물었다.
"시동생이 퇴원할 때까지 돌봐줄 거예요."
"언제쯤 퇴원하는데?"
"5, 6개월 걸린 데요. 물리치료까지 받아야 해서..."
"그럼 그동안만 봐주면 되는 거냐?"
"한 달 정도만 어머니가 돌봐주세요."
"왜 네가 돌보지 않고?"
"전 좀 할 일이 있어요."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아이들이 예쁘죠?"
"내 자식만 하겠니?"
어머니도 아이들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큰 애가 영옥이고 작은 애가 영준이에요."
영옥이는 여섯 살, 영준이는 이제 겨우 네 살이었다.
친정에서 돌아오자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거실의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러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