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4장. 흉가의 여인 1
보옥은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깜깜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에 섞인 빗소리가 쏴아 하고 유리창에 날아와 부서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빗소리 외에는 사방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보옥은 침대에 누운 채 야광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새벽 2시였다.
쨍그랑.
그때 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보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들어온 것이 틀림없어!)
보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2층 어디쯤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죽은 딸 윤미의 방이거나 남편의 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추 뇌리를 스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보옥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그놈들인가?)
보옥은 숨소리까지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2층은 어느 사이에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인지도 몰라.)
넓고 큰 집에 그녀 혼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집에서라면 소리를 지르거나 구원을 요청해도 마을까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마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보옥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정아버지의 말대로 땅과 집을 팔고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사서 이사를 할까 그랬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 집과 땅은 남편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딸이 이 집에서 죽은 것이다.
물론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으나 이 집이 남편과 딸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하고 말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도 복수 때문이었다.
보옥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복수하려고 결심하고 있는 자신이 이렇게 나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잠옷을 벗어 던지고 빠르게 소복 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저고리를 걸친 다음 옷고름도 매지 않고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조용했다. 그녀는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휙 불어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이 기분 나쁘게 펄럭거렸다.
(창문을 열어놓았어.)
보옥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집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새 2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피아노의 건반을 한 번 두드려 본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주방으로 달려가 부엌칼을 찾아 들었다.
폭풍의 밤에 짐승처럼 그녀의 가족들을 유린한 사내들이 또다시 침입해 들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들이 들어왔다면 부엌칼로 찔러야 했다.
그녀는 2층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했고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기도 했다. 자꾸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래선 안 돼!)
그녀는 벽에 기대고 서서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2층을 행해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갔다.
2층 거실도 조용했다. 어디 유리창이 깨졌는지 스산한 비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보옥은 재빨리 피아노가 놓여 있는 쪽을 쏘아보았다.
눈이었다. 어둠 속에서 파란 눈 두 개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놈의 고양이가!)
보옥은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도둑고양이였다. 피아노 위에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가!"
보옥은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렀다. 도둑고양이가 야옹 하고 소리를 지르며 피아노 위에서 풀쩍 뛰어내려 창문으로 달려갔다.
보옥은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비로소 2층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2층엔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은 거실 테라스 쪽으로 두 장이 깨져 있었다.
(고양이 짓이 아니야!)
보옥은 창문 너머로 깜깜한 어둠 속을 노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안방으로 내려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멀뚱멀뚱 눈을 뜨고 이것저것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도둑고양이가 꺼림칙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시체를 희롱한다고 했다.
어느 상갓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 여자가 죽어 염을 하게 되었는데 시체가 누워 있지 않고 자꾸 벌떡 일어나 염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넘어뜨리면 벌떡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무서워 시체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지나던 스님 한 분이 그 얘기를 듣고 상갓집에 들어왔다.
스님도 시체를 몇 번이나 쓰러뜨렸으나 시체는 그럴 때마다 오뚜기마냥 벌떡 일어났다.
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체를 깔고 앉기도 하고 끌어안고 눕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체는 또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인걸.)
스님은 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탁' 쳤다.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스님이 가리키는 뒷문을 열었다.
"고얀 것! 한낱 축생이 어찌 감히 인간을 희롱하느냐? 썩 물러가라!"
스님이 행랑채 지붕을 쳐다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님의 호통에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고양이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새까만 도둑고양이였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 있던 시체가 쿵 하고 나가자빠졌다.
대충 그런 얘기였다. 왜 그런 얘기가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옥은 눈을 감았다. 이제 좀 눈을 붙여야 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알 수 없었다. 보옥은 문득 이마가 선뜻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창문 밖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우두커니 보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 누구야?"
그러나 보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힐끗하더니 여자가 창문에서 사라졌다.
보옥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그녀는 여자가 창문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침대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