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6장. 미궁 속의 그림자 4
이튿날 보옥은 논현동으로 룸살롱 불야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불야성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논현동 뒷골목에는 술집이 즐비했고, 그녀는 거의 두 시간을 헤맨 뒤에야 겨우 불야성이라는 술집을 찾을 수 있었다.
술집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집도 5층 다용도 건물의 지하실에 있었다.
그녀는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계획을 세워야 했다.
불야성의 위치를 알았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주위의 건물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룸살롱 맞은편에 마침 러브호텔 `아일랜드`가 눈에 띄었다.
장급 여관이었다.
(저기서 룸살롱을 감시하면 되겠군...)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쇼트커트로 잘랐다.
그러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한결 젊어 보이십니다."
미장원의 남자 미용사가 거울 속의 그녀를 보고 말했다.
원래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미장원을 나온 그녀는 그 길로 백화점으로 가서 청바지와 스웨터 그리고 캐주얼화를 샀다.
그렇게 하는데도 하루가 소요되었다.
다음날 그녀는 논현동에 있는 장급 여관 아일랜드에 투숙했다.
305호실이었다.
그곳에선 룸살롱 불야성의 입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전망은 좋은 셈이우"
여관의 뚱뚱한 여주인은 인상이 수더분했다.
"방도 깨끗하고..."
"네, 괜찮군요."
"얼마나 묵으실 거요?"
"글쎄요. 열흘에서 한 달...? 아직 잘 모르겠어요.
돈은 열흘 치를 선불로 드릴게요. 숙박료 말이에요."
"아가씨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관에서 생활하려고 그러우?"
"결혼했어요. 전 대학교 조교수인데 우리나라 유흥가에 대한 리포트를 쓰려고 그래요."
"리포트?"
"논문 말이에요."
"아"
여주인이 비로소 아는 체를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여주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미안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숙박부도 가명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일랜드 여관에 투숙한 지 1주일이 지나갔다.
그녀는 그동안 룸살롱 불야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여주인과 종원들의 인상착의만 알아냈을 뿐 다른 것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심부름센터에 용역을 주어 11월 30일 김민우가 살해되던 밤에 그와 술을 같이 마신 호스테스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심부름센터는 진봉수라는 사내를 시켜 그 일을 알아냈다.
호스테스의 이름은 현애자. 한 달 전까지 풍원건설이라는 건설회사의 여비서로 있던 여자였다.
보옥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실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김민희가 찾아왔다.
뜻밖의 일이었다.
"오빠의 시체를 부검했어요."
민희는 보옥이 끓여서 내온 커피를 다 마신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랬군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과가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둠이 삼단같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빠의 위 속에서 수면제 성분이 발견되었어요."
"그럼 불야성에서...?"
"경찰이 수사에 나섰어요."
"오빠가 불야성에서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경찰에 했어요?"
"그건 안 했어요. 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부인과 먼저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어요."
"잘했어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불야성을 조사해야죠."
"조사한 뒤에는요?"
"그들이 왜 오빠를 살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죠.
오빠는 불야성에서 술을 마시고...
그때 누군가 오빠가 마신 술에 수면제를 탔겠죠.
그리고 집으로 오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을 테고... 누군가 쓰러진 오빠를 치고 달아난 거예요."
"그다음에는요?"
민희가 무섭도록 싸늘한 목소리로 보옥의 말을 가로챘다.
"복수해야죠."
"부인이 왜 우리 오빠의 복수를 하죠?"
"그걸 내가 꼭 말해야 하겠어요?"
"복수를 하려면 내가 해야죠."
"민희 씨!"
"난 돈 많은 사람들을 증오해요!
당신도 동정하지 않고요!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도 당신 쪽에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나를 어떻게 말해도 좋아. 그러나 이 일엔 끼어들지 마!"
"이것 봐요! 복수는 내가 할 거예요.!"
"민희는 구만리 같은 장래가 있어! 희망도 있고!"
"희망이 있다고요? 내 희망은 오빠였어요!
당신 같은 부자들은 모를 거예요!
오빠 하나 잘 되기를 바라면서 공장에 나가 연장근로, 잔업, 철야 작업까지 즐겁게 하던 계집애 마음을 말예요!
난 지금 이 세상을 전부 불 질러 버리고 싶어요!"
민희가 거실벽에 이마를 짓찧으며 소리 내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