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12장. 제 3의 살인 5
홍보옥의 친정집 사람들, 시가쪽 사람들, 그리고 그의 주변의 친지들까지 형사들을 시켜 모조리 훑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뚜렷한 혐의점을 찾을수 없었다.
기껏해야 강철구를 살해한 홍보옥의 잠시 아파트를 찾아낼을 뿐이었다.
"홍보옥과 오빠는 어떻게 알게 되었지?"
"오빠가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던 거여동 독서실에 홍보옥씨의 딸이 다녔어요.
그리고 홍보옥씨가 윤간을 당하던 폭풍이 불던 밤 홍보옥씨가 딸을 데리러 독서실에 왔는데, 그때 오빠가 홍보옥씨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 같아요."
"연정? 대학생이 유부녀에게?"
최천식 형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홍보옥씨는 대단한 미인예요."
"그렇긴 하지."
최천식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홍보옥이 상당한 미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홍보옥씨의 딸은 1주일 남짓 독서실에 나오지 않았는데, 오빠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래요.
그래서 찾아가 보니 홍보옥씨네 일가족이 집단 자살을 했더래요."
"홍보옥은 살았잖아?"
"홍보옥씨는 뱃속의 것을 모두 토해 놓은채 쓰러져 있었대요. 겨우 숨이 붙어 있어 병원으로 옮겼는데 간신히 살아났나봐요."
"그러니까 생명의 은인 셈이군."
"하늘의 섭리겠죠."
"하늘의 섭리?"
"결국 그 때문에 오빠가 죽었으니까요. 전 오빠의 죽음이 홍보옥씨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오빠는 어쩌면 홍보옥씨와 달리 윤간을 당한 이유를 조사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저 혼자만의 생각이긴 하지만요."
그때 최천식 형사의 허리에 있는 무선 호출기 삐삐의 신호가 왔다.
삐삐를 허리춤에서 꺼내자 수사과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잠깐 실례..."
그는 김민희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카운터로 가서 수사과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형사입니다."
그는 당직 형사였다.
"부산 시경 전통인데 강철구와 김인필 살인사건과 유사한 살인 사건이 부산 밀라노 특급 호텔에서도 발생했답니다.
범인은 홍보옥으로 밝혀졌지만 피살자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그래?"
그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홍보옥이 부산까지 가서 복수를 했다면 사건은 전국을 무대로 확대되고 있는 셈이었다.
"사건 현장 보존해 놓는다구 내려와 보랍니다."
"알았네."
그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연말분위기에 들뜬 지금 부산까지 내려가서 수사를 해야 할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나 벌써 세명의 사내를 살해한 홍보옥의 체포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김민희에게 돌아와 앉았다.
"홍보옥이 또 사람을 죽인 모양이야."
"네?"
김민희는 눈이 크게 떠졌다.
"부산 밀라노 특급호텔이야. 신원 미상의 남자가 살해되었다는군..."
"..."
"빨리 체포해야 될텐데 큰일이야."
"아직 복수 대상자는 한 명이 남았어요."
"여자?"
"네,"
"홍보옥이 복수하기를 바라나?"
"네."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세상을 바르게만 살 수 없어요."
김민희는 차갑게 내뱉었다.
최천식 형사는 김민희에게서 오랜 공장 생활과 오빠의 죽음으로 그녀의 가슴이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그러나 법은 지켜야 해."
"법에도 융통성이 있겠죠."
"물론 그렇겠지."
최천식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면 새 해야. 졸은 마음을 갖고 살도록 해야지... 난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야 돼."
"저를 체포하지 않으세요?"
"법에도 융통성이 있다면서...?"
최천식 형사는 쓸쓸하게 웃으며 카운터로 걸어가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는 애초부터 김민희를 체포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김민희를 연행한 것은 사건의 내막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다.
범죄나 악에도 보호되어야 할 종류가 있다는 것은 그가 오랜 수사관 생활에서 터득한 이치였다.
그는 그 이치를 불변의 진리처럼 믿고 있었다.
다방을 나오자 진눈깨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그는 코트의깃을 바짝 세우고 수사본부를 향해 걸어갔다.
먼저 예성개발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고 부산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 다음은 홍보옥의 체포였다.
홍보옥은 결장수사가 부산으로 집중되고 있을 때 수사망을 피해 서울로 상경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공항과 고속버스 터미널, 그리고 서울역에 비상망을 쳐두어야 한다.
보옥은 느릿느릿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고 있었다.
목포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아담과 이브'에서였다.
그녀의 테이블 위에는 방금 가판대에서 사가지고온 석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사회면이었다.
톱 기사는 부산의 특급호텔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의 비상망 속에서도 연쇄살인 부산에서도 발생!' 이라는 제하의 기사엔 그녀의 수배사진까지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경찰이 공항과 터미널, 그리고 역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으나 범인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숏커트 머리의 30대 여인은 종적이 묘연한 점을 미루어 이미 부산을 탈출했을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다.
그녀가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나이프로 고기를 썰은 뒤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눈은 여전히 신문기사를 쫓고 있었다.
경찰이 서울로 상경하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고 검문을 강화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눈이 차갑게 번쩍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30분후에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날씨가 포근했다.
하늘은 눈이 내릴 듯 우중충하더니 때아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번화가의 양품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양품점에서 청바지와 털모자를 하나 샀다.
다음에 그녀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스포츠웨어 전문점에서 붉은색 파카와
운동화, 그리고 스웨터를 한번 산 뒤 뒷골목으로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가 다섯시간정도 잠을 잤다.
박재만을 죽이던 일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으나 그녀는 억지로 눈을 붙였다.
그녀가 잠을 깬 것은 밤 10시쯤의 일이었다.
그녀는 옷을 모두 갈아 입은 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완전히 어둠속에 잠겨 있었고 진눈깨비도 그쳐 있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하기 두 시간 전의 밤이었다.
거리는 밖에서 새해를 맞이하려는 젊은이들로 가득차 이었다.
그녀는 붐비는 인파를 걷다가 디스코텍을 찾아 들어갔다.
번화가의 디스코텍이어서 그런지 그 디스코텍은 초만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남자 대학생 세명이었고 여자 대학생이 두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대학 졸업반으로 졸업기념 여행을 흑산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목포에 온 것은 약혼이 깨져서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들 중에는 파트너가 없는 남자 대학생이 그녀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학생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다.
새벽이 되었다.
대학생이 더듬거리며 그녀에게 여관으로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망설이는 하면서 대학생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날 새벽 그 대학생은 스스로 그녀에게 동정을 바쳤다.
그날 저녁, 그러니까 1988년 1월 1일 저녁 6시, 경찰의 삼엄한 검문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서울역 대합실에 남녀 대학생들 여섯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호남선에서 내린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경찰은 젊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경찰은 30대 여인들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검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