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정사 - 13장. 악인은 지옥으로 4
봄비가 기분 좋게 내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적시는 빗방울의 푸릇한 감촉도 상큼하기만 했다.
그녀는 어둠에 둘러싸인 이층집을 조용히 응시했다.
몇 달 전인가, 그 집에 살던 젊은 여자와 딸을 강철구, 김인필, 박재만을 시켜 윤간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그런 일은 그녀로서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풍원건설 배광표 사장은 그일을 하는 대가로 2천만원을 제시했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아니었다.
그 집 사내가 보는 앞에서 여자를 강간하고 그걸 사진으로 찍기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안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것은 배광표 사장이 그 일대의 군사시설 보호지역이 해제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땅을 매입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은 배광표 사장의 음모대로 되고 말았다.
그 집의 남자와 딸이 약을 먹고 죽었고, 여자가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하는 소동을 겪은 뒤의 일이었다.
물론 남자와 딸이 자살해 죽고 여자가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한 것은 배광표 사장이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다.
배광표 사장은 그런 일을 당한 그 집 가족들이 집을 팔고 떠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일가족 집단 자살을 기도하리라고는 배광표 사장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여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은 그들의 조작한 유령놀이 때문이었다.
남자와 딸이 죽은 뒤에 땅을 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던 여자가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땅을 팔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그런 짓까지 꾸미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여자를 마을에서 쫓아내기 위한 음모였다.
속칭 당나무 골이라는 그 마을 대부분 주민들을 배광표 사장은 그런 방법으로 쫓아냈다.
그는 지방신문에 난 당나무 골의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기사에 착안하여 그 마을에 비밀리에 불을 질러 원인 모를 화재 사건을 터뜨렸고, 멀쩡한 집에 돌멩이를 던져 흉가라는 소문을 내는 둥 수법도 다양했다.
그 마을의 줄을 이은 초상은 우연히 겹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배광표 사장은 당나무골 일대 7만평의 땅을 손쉽게 매입했던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군사시설 보호지역으로 묶여 있던 땅이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할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땅이 모두 군사시설 보호지역에서 해제되었다.
그러자 땅값이 순식간에 20배나 뛰어올라 배광표 사장은 불과 몇 달 만에 막대한 돈을 벌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두 가지로 생각했다.
그 하나는 배광표 사장이 땅을 매입한 뒤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어 해제했을 가능성이었고, 두 번째 조그만 그 일대의 땅이 해제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안 배광표사장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매입했을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후자일 가능성이 더 유력했다.
그것은 군사시설 보호지역의 해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정경유착의 차원이 아니었다.
거여동 일대의 군사시설 보호지역이 해제되리라는 정보를 누군가에게서 듣고 꾸민 음모일 것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거여동 일대의 군사시설 보호지역은 용도 변경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양혜숙은 대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누구요?"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배광표 사장의 소프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 마담이에요."
"거미로군..."
대문이 덜컹 열렸다.
자동개폐기로 열게 되어 있는 대문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섞여 목련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백목련이었다.
양혜숙은 그 꽃에서 한 때 이 집의 주인이었던 홍보옥을 연상했다.
비를 맞고 있는 백목련의 모습의 남편과 딸을 잃고 비탄에 잠겨 있는 그 여자처럼 처연해 보였다.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홍보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홍보옥은 지금 살인마로 변해 있었다.
양혜숙은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배광표 사장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이 불콰해 보이는 것이 벌써 꽤 마신 모양이었다.
"혼자서 드세요?"
양혜숙은 화사하게 웃으며 배광표 사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비가 제법 많이 오는 모양이지?"
"네. 봄비예요."
"정말 오랜만이군. 양 마담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그래요. 홍보옥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뒤로는 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경찰의 감시가 무척 심했지. 양 마담 정말 잘 버텼어."
"제가 발설하면 우린 모두 끝장이니까요."
"그래, 우리 모두 끝장이지. 누가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어?"
"없었어요."
"내 예상대로군. 경찰은 국회의원 선거 개표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 한잔하겠나?"
"네."
양혜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린 계집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어디론가 보내 버린 모양이었다.
배광표 사장이 그녀의 잔에 양주를 가득 따랐다.
양주병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거 혹시 수면제 탄 것 아니시겠지요?"
"사람이 의심은..."
배광표 사장이 양혜숙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자신이 마셨다.
"죄송해요."
"이젠 마시겠나?"
"네."
배광표 사장이 다시 양주를 따라 양혜숙에게 건네주었다.
양혜숙이 그것을 단숨에 비웠다.
"제 잔도 한 잔 받으세요."
양혜숙이 배광표 사장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러지. 난 이미 전작이 있으니 조금만 따라."
"그러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드시고 저도 한 잔 주세요. 살아 3배 죽어 3배라고 하지 않았어요.?"
"전작이 있다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양혜숙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여기 잔이 또 있잖아?"
배광표 사장이 탁자 위에 있는 다른 잔을 양혜숙 앞에 옮겨 놓으며 술을 따랐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수고는요."
"양 마담이 얘기한 돈은 준비됐어. 아껴 쓰면 평생 써도 모자라지 않을 거야."
배광표 사장이 양복상의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내어 양혜숙에게 내밀었다.
"지갑에 들어 있어. 한 번 꺼내 봐."
양혜숙이 두 손으로 지갑을 받았다.
지갑은 고급스러운 악어가죽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두툼한 지갑의 수표를 꺼냈다.
악어가죽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우선 수표가 액면가 1천만 원짜리 인지 확인한 뒤 장수를 세어 보았다.
30장이었다. 액면가 1천만 원짜리 30장이 틀림없었다.
"사장님. 정말 계산이 깨끗하시군요,"
양혜숙은 감격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3억이라는 큰돈을 만져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자, 그럼 우리 축배를 들까?"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양혜숙은 황급히 배광표 사장의 잔에 술을 따르려 했으나 술병이 비어 있었다.
"어머 ! 술이..."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저기 벽 찬장에 또 있어."
배광표 사장이 거실 벽을 가리켰다.
거기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장식장 안에 양주병 하나가 보였다.
나폴레옹 코냑이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양혜숙이 소파에서 일어나 장식장을 행해 걸어갔다.
그때 배광표 사장은 재빨리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양혜숙의 술잔을 탁자 밑에 있던 술잔과 바꿔 놓았다.
똑같은 모양의 그 술잔에는 똑같은 술이 반쯤 들어 있었다.
"향기가 좋네요."
양혜숙이 소파로 돌아와 양주병을 따며 말했다.
"그거. 내가 외국 나가서 가져온 거야."
"그럼..."
양혜숙이 나폴레옹 꼬냑을 배광표 사장의 잔에 반쯤 따랐다.
"자! 건배"
"건배!"
둘은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서 마셨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어요."
양혜숙이 입언저리에 미소를 달고 3억 원 든 핸드백을 들고 있어 섰다.
그녀는 3억원이 손에 들어온 이상 한시바삐 배광표 사장에게서 떠나고 싶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너무 아쉽지 않아?"
배광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양혜숙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 마지막 파티를 성대하게 즐겨야지."
"마지막 파티?"
"다 알면서 그래? 여긴 침대도 아주 좋은 게 있어."
"사장님도!"
양혜숙이 눈웃음을 치며 교태를 부렸다.
3억 원이라는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고 선뜻 내주 배광표 사장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샤워하겠어?"
"아뇨. 전 목욕하고 왔어요."
"그래? 그럼 나 샤워할 동안 안방에서 좀 기다려."
"네."
양 마담은 선선히 대꾸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몇 달 전 그녀가 사내들 셋을 데리고 홍보옥과 그녀의 딸을 윤간했던 자리였다.
그녀는 길게 하품하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방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돈이 든 핸드백을 침대 머리맡에 놓고 참으로 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밖에선 여전히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또 하품을 했다.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술을 마신 탓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양주 몇 잔에 취해 버릴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배광표 사장이 샤워할 동안 눈이나 붙여 두자고 생각했다.
배광표 사장이 욕실에서 나오며 깨워 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 짓을 하기 위해 그녀를 깨울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하품한 뒤에 침대에 누웠다.
그 시간 배광표 사장은 거실의 술잔과 술병, 그리고 문고리에 묻어 있을지 모를 양혜숙의 지문을 깨끗이 지우고 있었다.
20분 후, 그는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양혜숙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깊은 밤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고 침대로 가까이 가 양혜숙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양혜숙은 깨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양혜숙의 뺨을 때려보았다.
그래도 양혜숙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네가 내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탈이야.)
그는 양혜숙의 핸드백에서 수표를 꺼내어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음에 그는 양혜숙의 손부터 침대 귀퉁이에 묶었다.
그리고 양혜숙의 발을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쪽 귀퉁이에 나이론 줄로 묶었다.
그러자 양혜숙은 마치 침대 위에 사지를 벌리고 누운 꼴이 되었다.
그는 사지를 완전히 묶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양혜숙의 입에 접착성이 강한 테이프를 붙였다.
양혜숙은 그때야 눈을 크게 뜨고 몸부림하기 시작했다.
입이 테이프로 틀어막히자 숨쉬기가 고통스러워 눈이 떠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배광표 사장이 양혜숙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양혜숙은 눈을 부릅뜨고 몸부림쳐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내 양혜숙의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배광표 사장이 자신의 허리띠를 뽑아내어 양혜숙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양혜숙이 침대에서 튀어 오를 듯이 발버둥을 쳐댔다.
그러나 배광표 사장은 양혜숙의 몸에 채찍으로 얻어맞은 듯한 무수한 상처가 생긴 뒤에야 비로소 그 짓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나이프를 꺼내 양혜숙의 아랫배를 겨누었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양혜숙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안타깝게 도리질했으나 나이프는 빠르게 그녀의 아랫배를 찔러 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배가 화끈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웬일인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죽는다는 한순간의 공포가 그녀의 고통조차 잊게 하고 있었다.
나이프는 양혜숙의 아랫배에 깊숙이 박혔다.
악마 같은 사내가 그것을 빼자 피비린내가 확 풍기면서 선현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또다시 두 손으로 나이프를 높이 쳐들었다가 여자의 아랫배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