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남자 14
“좀, 괜찮았어.”
“.....”
냅킨을 정리하려던 서진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지원을 돌아본다. 그를 쳐다보는 지원의 표정이 뭔가 미묘하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이 살짝 눈을 찡그린 서진에게 지원이 말을 건다.
“왜?”
“사장님.”
이 스무 살짜리 어린애는 감이 좋다.
스무 살짜리들이 다 이렇게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 되바라진 스무 살짜리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이 좋다.
눈치가 귀신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눈치가 귀신같은 스무 살짜리가 말했다.
“우리 형 좋아해요?”
그 순간 서진의 손에 들려 있던 냅킨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서진이 별 생각을 다했다. 그렇게 표시가 났나? 변태라고 생각하려나? 게이 아닌데. 게이라고 오해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친다.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바닥으로 다 흘린 채로 서진이 지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린다. 그리고 말해버렸다.
“그러면 안 돼?”
그런 서진을 보며 지원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우와, 그냥 한번 찍어 봤는데, 대박.”
이 얄미운 스무 살짜리를 한 대 치고 싶다고, 문득 서진이 생각했다.
*
“뭘 그렇게 많이 사?”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던 혜주가 은서가 카트에 집어넣는 것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카트 안에는 잡곡과 고구마, 그리고 닭 가슴살 팩. 고등어와 무지방 우유까지 담겨져 있었다. 두부와 참치 캔, 그리고 달걀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이한 씨 거야. 식단 조절해야 하거든.”
“식단 조절? 이한 씨 다이어트 해? 말랐잖아.”
“아니, 시합 준비 중이야. 그래서 체중도 빼야 하고 근육도 다시 만들어야 한대. 그래서 식단표 짜준 대로 장 봐서 가기로 했어.
“시합?”
“응. 다음 달에 시합 나가. 멋있지?”
“우와, 진짜 멋있다. 그럼 나도 시합 보러 가도 돼?”
“그럼. 태경 씨하고 같이 와.”
“그럴까?”
은서의 카트를 들여다보는 혜주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하다. 봄에 만난 은서와 이한 커플이 벌써 결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커플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태경과 사귀고 있던 혜주 자신은 아직도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언제 결혼할까. 아, 빨리 결혼해서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애나 키우고 싶다.”
“혜주 씨는. 전업주부들 바람이 애 맡기고 직장 나가는 거라는 기사도 못 봤어?
애 키우고 집안일 하는 거 장난 아니래. 직장이 더 편한 거라고 다른 부서 워킹맘들 얘기하는 거 혜주 씨도 들었잖아.”
“그땐 그때고. 일단은 빨리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태경 씨는 결혼의 결자도 안 비치네.”
“태경 씨도 생각이 있겠지.”
“은서 씨는 회사 그만두면 다시 복직 안 할 거지?”
“나 원래 일하는 거 그렇게 썩 좋아한 것도 아니고, 뭔가 성취 의욕도 없었으니까.”
“맞아, 은서 씨 그런 면이 있었어. 항상 뭐가 심드렁했었거든. 점심시간에만 반짝반짝. 꼭 밥 먹으러 회사 오는 사람처럼 말이야.”
혜주의 말에 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혜주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던 것이다. 밥을 먹으러 회사에 갔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일도 아닌데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이 되는 것은 아마도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외로움에 지쳐서, 혼자 먹는 밥에 지쳐서 구내식당 밥이 맛있는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그야말로 밥을 먹으러 회사에 다니던 것이 자신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마트에서 장을 보며 행복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이한이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퇴근하면 이한과 함께 얼굴을 맞대며 저녁을 먹고, 언제 외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반짝반짝. 마음에 반짝거리는 햇살을 선물해준 그 남자 덕분일 것이다.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남자가 그녀에게로 걸어와 준 덕분일 것이다.
그 남자로 인해 그녀도 반짝반짝 빛나게 되었다. 그녀의 삶 전부가 반짝반짝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 역시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
“다른 mr은 필요 없어요?”
“네, 그냥 기타 반주로만 가려고요.”
녹음실 엔지니어가 밖으로 나가자 지원이 심호흡을 하며 민규를 쳐다본다.
“준비됐어?”
지원의 말에 민규가 기타 줄을 한번 튕기며 가볍게 웃는다.
“난 항상 스탠바이야.”
“그럼 시작할까?”
15만 원을 주고 녹음실을 빌린 지원이다.
지원에게 있어서는 15만 원은 거금이다.
이한이 주는 생활비는 대부분 은행에 저금하고 따로 하고 있는 과외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지원의 입장에서 15만 원은 한달 생활비에 가까운 거금이지만 과감하게 녹음실에 투자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형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놓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더 이상 이한이 테이프를 듣지 않게 되었다.
테이프 대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랍 안에 넣어둔 테이프는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음질도 좋지 않았다.
정식 녹음실이 아닌 곳에서 대충 녹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굳이 전문 녹음실을 거금을 들여 빌려 녹음을 하려는 이유는 지금 부르는 노래들을 mp3 파일로 바꿔서 이한의 핸드폰에 넣어주기 위해서다.
지금까지도 이한은 지원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매주 주말이면 서진의 카페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지만 아직도 이한은 그걸 모른다.
딱히 자연스럽게 알기 전에는 먼저 말할 생각도 없다. 지원이 그 정도로 살가운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가운 성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민규까지 데리고 와서 굳이 노래를 녹음하는 것은 뭔가 응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도전하는 형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다.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건 창피해서 못한다.
서진은 새벽과 저녁으로 이한의 러닝메이트가 되어준다고 들었다.
운동과는 담을 쌓아서 지원은 그런 것은 해주지 못한다.
지원이 형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노래로 응원해주는 것뿐이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형이 뛰기를 바랄 뿐이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동생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형이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형이 달릴 때 자신의 노래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그 곁에서 함께 달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노랫소리가 힘내라는 응원으로 들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에 얼굴을 가져다대는 지원의 감은 눈이 웃고 있었다. 민규의 손가락에서 은은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아, 지원아.”
케이크를 만들던 중에 지원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온 이한이 가게 밖에 서 있던 지원을 발견했다.
“왜 안 들어오고 그래?”
“금방 가야 해. 바빠.”
지원이 콧등에 밀가루를 묻히고 있는 이한을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거울 좀 보고 얼굴 좀 닦아. 그게 뭐야? 다 큰 남자가.”
“아, 늘 이래.”
이한의 웃음에 지원이 슬쩍 시선을 비껴버린다. 바보처럼 웃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렇게 바보처럼 웃을까.
“들어와. 샌드위치 만들어줄게.”
“됐어. 바쁘다고 그랬잖아.”
“응?”
지원이 내민 손을 이한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다짜고짜 손을 내민 것이다.
“왜?”
“핸드폰 내 놓으라고.”
“핸드폰? 내 핸드폰? 왜?”
“이유는 묻지 말고.”
지원의 말에 이한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원에게 건네준다.
“비번 없지?”
“응.”
이 남자는 바보처럼 핸드폰에 비번 거는 것도 모른다. 아니, 비번을 걸어놓지를 않는다. 그걸 지원은 잘 알고 있다.
받아든 이한의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 자신의 핸드폰을 다른 손에 든 지원이 블루투스를 이용해서 녹음한 음악파일을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원이 뭔가를 하는 동안 이한이 그런 지원을 쳐다만 본다.
요즘 들어서 확실히 말도 많아지고 이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것도 은서 덕분일지 모른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은서라는 여자가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순간 많은 것이 변했다.
보이지 않던 미래가 보이게 되었고, 끝나지 않을 터널 같았던 끝이 환하게 보이고 있었다.
막연하게 그리던 행복이 어느 순간 옆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은서라는 여자가 자신에게 건 마법이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법.
“자.”
지원이 이한에게 핸드폰을 건넨다.
“뭐 했어?”
“거기 음악 하나 다운 해놨으니까 운동할 때 들어.”
“음악?”
“그냥 들어. 묻지 말고.”
퉁명스럽게 말한 지원이 걸음을 옮겨 놓자 이한이 당황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가려고? 잠깐만. 친구들하고 저녁이라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한이 지갑을 안에 두고 온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안에서 지갑 가지고 나올 테니까.”
“됐어. 카페 가서 사장님 뜯어 먹을 거야.”
“지원아.”
이한이 부르는 소리를 못들은 척 지원이 얼른 그 자리를 뜬다. 이한이 핸드폰에 다운된 노래를 확인하기 전에 도망가려는 것이다.
창피한 마음 절반, 두근거리는 마음 절반.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원이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떠났다.
아마 지원의 빨개진 얼굴은 뒤에서 절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한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지원이 얼마나 얼굴이 빨갛게 변했는지.
*
탁, 탁. 보도블록을 차는 발소리가 경쾌하다. 밤이 내린 도시를 달리는 이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을로 접어들며 불기 시작한 선선한 바람이 구슬땀이 흘러내리는 그의 이마를 시원하게 닦아주며 스쳐 지나갔다.
자전거를 탄 서진이 속도를 조절하며 앞서 가고 있다. 저녁 카페 영업을 포기하고 이한을 위해 러닝메이트가 되어준 서진이다.
나이가 들어 뛰는 것은 자신 없다며 대신 자전거를 끌고 나와 매일 밤과 매일 새벽 함께 달려주는 서진이 눈물 나도록 고마운 것은 저런 사랑을 받기에 자신이 서진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뛰는 것은 외롭다. 그래서 누군가 옆에서 함께 해주면 힘이 난다.
그러나 옆에서 함께 달려주는 것은 지루하고도 힘든 일. 그 일을 서진이 자청해주었다. 고마운 사람이라고 이한이 생각했다.
그에게 서진은 항상 고마운 사람이었다.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자기 같은 사람을 친구로 여겨주고 무작정 찾아가도 싫다고 하지 않는 좋은 사람.
“자, 앞으로 2키로 달리고 턴할 거야, 이한 씨!”
“네!”
페달을 밟는 서진을 향해 이한이 힘차게 대답했다.
달리는 법을 아직 다리가 잊지 않고 있어서 고마웠다.
주먹을 날리는 법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주는 몸이 고마웠다.
아직 한 번 더 링 위에 설 기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리고 응원해주는 이들이 고마웠다.
링 위에 선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준 은서에게 고마웠다.
다시 기회를 준 체육관 식구들, 그리고 일찍 퇴근하는 것을 허락해준 제과점 사장님 부부께도 고마웠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자신은 그들에게 그만큼 좋은 사람이었던가 싶어 부끄러웠다.
기회가 된다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동안 이한이 앞서 나가는 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저렇게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되자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지금 귓가에 흐르는 노랫소리. 이어폰을 귀에 꽂기 전에는 어떤 노래인지 몰랐었다.
그저 지원이 요즘 유행하는 좋은 노래를 다운받아준 것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기타 소리에 이어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만약 서진이 앞에 있지 않았다면 분명 울어버렸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지원의 것이었다. 지원이가 자신을 위해 불러주는 노래.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 지원이가 불러주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돌 뿐이었다.
- 형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다는 걸 깨달았다.
- 나는 형 동생인데… 남이 아닌데.
진짜 지원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애였는지 몰랐었다.
아무것도 몰랐었다.
직접 노래를 녹음해서 선물해줄 정도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줄 정말 몰랐었다.
지원이의 마음, 정말 몰랐었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줄, 몰랐었다.
그 마음을 몰랐던 것이 미안해서 가슴이 울컥했고,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애인 줄 몰랐던 것이 미안해서 또 한 번 가슴이 울컥했다.
그렇게 가슴이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귀에서 지원이가 불러주는 노래만 듣고 있어도 하루 종일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다리도 무거워지지 않고, 숨도 가쁘지 않다.
어디까지라도 달려갈 수만 있을 것 같은 다리를 움직이며 이한이 앞서 가는 서진이 이끄는 길로 달려간다.
길 끝이 환했다. 가로등 아래로 길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차들의 라이트들이, 도심의 불빛들이, 그리고 밤하늘 위에 수놓아진 별빛들이 모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그거 별 아니라 거의 다 인공위성이에요. 우리 형은 바보라서 그걸 별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
이한이 돌아오면 먹일 야식을 만들던 은서가 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한이 운동 때문에 밤 열한 시가 넘어서 돌아오게 되는 바람에 그때까지 지원이 은서의 집에 와 있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은서가 말했지만 ‘전에 그 나쁜 놈이 또 언제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지원이 고집을 부린 것이다.
홀몸도 아닌 ‘형수’를 절대로 혼자 집에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거 먹어봐. 괜찮아?”
은서가 건네주는 샐러드를 한입 먹은 지원이 삼키지도 않고 그대로 티슈에 뱉어버린다.
“사람 먹는 거 맞아요?”
말이라도 절대 맛있다는 빈말을 하지 않는 지원인지라 은서가 저 얄미운 입을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맛없어?”
“맛있고 없고를 떠나서, 짜요. 소금 뿌렸어요?”
“응. 간 하려고.”
“아, 누나 정말. 운동선수 식단에 소금 뿌리면 안 된다는 거 몰라요? 그거 상식이잖아요.
누나는 정말 운동선수 내조는 못하겠다. 아니 그 이전에 음식 절대로 하면 안 되겠다.
소금 정량 모르죠? 이건 그냥 소금 뿌린 게 아니라 아예 소금을 들이부은 수준이야.”
“그 정도로 심해?”
“이거 가져가서 몽땅 다 씻어서 다시 그릇에 담아요.”
시어머니 같은 지원의 말에 은서가 툴툴거리며 그릇에 담긴 닭 가슴살 샐러드를 싱크대로 가져가 찬물에 씻는다.
고기와 야채를 전부 씻어 물기를 털어내고 다시 그릇에 담아오자 지원이 은서의 손에서 빼앗듯이 그릇을 건네받았다.
“제가 할 테니까 누나는 야채 주스나 믹서에 갈아놔요.”
“나도 볼래. 어떻게 하는지.”
“소금은 뿌리지 말고요, 올리브 오일만 살짝 뿌려서.”
지원이 손으로 야채와 닭 가슴살을 버무리는 걸 은서가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디.”
그릇 안의 야채와 고기를 손가락으로 집어든 은서가 얼른 한 입 먹어본다. 그리고 눈살을 찡그렸다.
“맛없어.”
“원래 이렇게 먹어요. 간 안하고.”
“.....”
지원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은서가 째려본다. 틀린 것도 맞다고 우길 성격이기 때문이다.
“누나도 다이어트 하고 싶으면 이렇게 드세요. 살 안 찌고 근육량 늘어난대요.”
“난 말라서 다이어트 안 해도 돼.”
“누나 요즘 배 나왔다는 거 알아요? 벌써 아기 배 나왔을 리는 없고.”
“윽.”
정곡을 찌르는 지원의 말에 은서가 두 손으로 배를 가린다. 요즘 입맛이 너무 좋아서 밥을 두 그릇씩 먹다보니 살짝 살이 찌긴 찐 것이다.
“애 낳고 살 빠진다는 말 다 거짓말이라니까 미리 미리 관리해요. 안 그래도 연하 남편 데리고 살면 불안할 텐데.”
얄밉게 할 말 다 해버리는 이 예비 시동생을 은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본다.
하지만 가란다고 해도 가지도 않을 게 뻔하니, 이한이 돌아오면 다 일러주자 유치한 생각을 하며 은서가 믹서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위잉- 하며 믹서가 돌아가는 주방의 풍경이 그랬다.
한 명은 형을 위해 샐러드를 만들고 있고, 한 명은 남친을 위해 야채 주스를 만들고 있는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로웠다.
“보이세요?”
여의사의 말에 이한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냐는 그 말이 아니더라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이한이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진으로는 그저 작은 점에 불과했던 ‘점’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화면 속에서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점’이. 그녀와 자신의 작은 ‘점’이.
“아빠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네요.”
이한의 빨갛게 변한 얼굴이 재미있는 듯 여의사가 누워있는 은서를 향해 웃는다.
“이쪽이 머리, 그리고 이쪽이 배, 여기가 발.”
의사가 알려주는 대로 이한이 신기한 듯 시선을 움직이며 눈 안에 그 모습들을 담아둔다.
“머리… 발.”
작은데도, 저렇게 작은데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나름의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한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신기했죠. 나도 처음엔 엄청 신기했어요.”
스팀 밀크를 앞에 두고 은서가 뿌듯하게 웃으며 살며시 배를 만져보는 중이었다.
“뭐랄까 머릿속으로는 다 알겠는데, 직접 움직이는 걸 보니까 기분이 막 이상해지는 게, 이한 씨도 신기했죠?”
“네.”
이한이 작게 웃었다. 은서의 퇴근 시간을 맞춰서 같이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진이 아니라 진짜 점이가 움직이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은서가 졸랐기 때문이다.
“조금 지나면 눈코입도 보인데요. 요즘은 초음파가 좋아서 웃는 얼굴도 볼 수 있다고 하던데요?”
“웃기도 한대요?”
놀랐다는 듯 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안대요. 엄마가 슬픈지 기쁜지, 화가 났는지 놀랐는지, 엄마 기분을 애기가 전부 다 안데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 마음씨 엄청 곱게 써야겠어요.”
“은서 씨 원래 착한데요 뭐.”
“어땠어요?”
“네?”
집에서 가져온 야채 주스를 마시려던 이한이 은서의 물음에 얼굴을 들었다.
“뭐가요?”
“우리 점이 직접 본 소감. 어땠어요?”
“그건.”
잠시 입을 다문 채로 야채 주스가 든 텀블러를 만지작거리던 이한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잘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뭐야.”
“아니요.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작은 아이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이는데, 나는 더 잘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필사적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만약 어중간하게 살면, 그저 적당히 살면 점이에게 정말 얼굴도 들지 못할 아빠가 되겠구나 싶어서요.
점이는 그렇게 작은데도 은서 씨 안에서 지금도 필사적으로 살고 있는데 내가 그렇지 못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점이 아빠인데, 점이보다 못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시합, 떨려요?”
이제 내일이 시합이다. 이한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어쩌면 시합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은서가 생각했다.
“떨려요.”
“무서워요?”
“아니요. 무섭지는 않아요.”
“질 것 같아요?”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요.”
“너무 승패에 미련두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면 되잖아요.”
“후련하게 하고 싶어요.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후련하게.”
“어떻게 하면 후련해질 것 같아요?”
“이기면요.”
이한의 눈동자가 은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겨서 은서 씨 앞에 서면 후련해질 것 같아요.”
“그럼 이겨요.”
은서가 살며시 손을 내민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 위에 이한의 손이 덮였다.
자신의 손을 덮은 이한의 손을 살며시 쳐다본 은서가 그 손 위에 손 하나를 더 얹어 놓는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이한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살며시 끌어당긴다.
“이건 꼭 이기라는 도장.”
끌어당긴 손등 위에 은서가 살짝 키스했다.
“이기면 이 손으로 반지 키스 세리머니 해줘요.”
“축구 아닌데.”
은서의 말에 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어때요. 하면 되지.”
“알았어요. 꼭 할게요.”
“여기 와 봐요.”
은서가 자기 옆 자리를 가리킨다. 한적한 오후 야외 테이블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은서가 가리키는 대로 그녀의 옆에 와 앉은 이한이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다.”
“누가 보지 않을까요?”
“보면 어때요. 결혼할 사인데.”
“그런가요?”
“그럼요. 애 엄마 애 아빠인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그럼 눈 감아요.”
“에헷.”
은서가 살짝 웃으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그녀의 뺨에 처음에는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지나간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뺨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의 입술 위에 내려앉는다.
다정하게 포개진 입술의 느낌에 은서가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결을 이한이 살짝 입술을 벌려 받아 마신다.
그녀의 숨결을 살짝 들이마신 이한이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벌리고 그 안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간질간질한 키스에 먼저 웃음을 터트린 것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숨결을 나누어갖는 간질간질한 키스에 웃음을 터트린 두 사람이 이내 다시 입술을 포갰다.
다정하게 입술을 맞추며 깍지 낀 손가락을 맞물린 채로 움직임을 멈춘 두 사람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바짝 붙어 있는 가슴과 가슴으로 서로의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포개진 입술에 열기가 오른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녀가 눈을 뜨려 하자, 눈뜨기 직전 그녀의 눈꺼풀에 다시 한 번 다정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정한 속삭임이.
“고마워요.”
그 속삭임에 은서가 눈을 뜨려던 것을 포기하고 그냥 눈 감은 채로 이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다.
아마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이 남자가 그녀에게 고마워하는 것보다 그녀가 이 남자에게 몇 만 배는 더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이 순진한 남자는 모를 것이다.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것인지를, 아마 이 바보 같은 남자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
“긴장 돼?”
물수건과 함께 건네지는 목소리에 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선호가 서 있었다.
“형.”
“긴장하지 마. 그냥 실력대로 해. 네 상대 알잖아. 실력으로는 너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놈이라는 거.”
“전 꽤 쉬었잖아요.”
“쉰 거 1년이나 되냐? 누가 알면 한 10년 쉰 줄 알겠다.”
“막상 달려보니 다리가 많이 무겁더라고요.”
“다 그래. 나도 일주일 놀면 다리가 천근이더라. 그런데 감각 금방 돌아오니까 긴장하지 마. 너 지난번에 몸도 안 풀고 나 이기고 그랬잖아.”
“그야 형은.”
“늙어서?”
“아뇨, 그게 아니라.”
“한 방에 보내버려. 알지? 한 방.”
“네.”
“KO 아니면 못 이긴다. 이 바닥 텃세 알잖아. 작년에도 다 이긴 시합 판정으로 빼앗겼는데 오늘 또 그러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 확실하게 바닥에 눕혀 버려. 판정으로 장난 못 치게.”
“그런데 관장님은 안 오셨어요?”
“오셨어. 그런데 시합 끝날 때까지는 너 안 보시겠데.”
“왜요?”
“그야 핑계는 많겠지만 미안하신 거겠지. 빽으로 너 밀어줄 형편도 아니시고, 지난번에도 빽 없어서 너 다 이긴 시합 뺏기는 거 보셨고, 오늘도 또 그렇게 될까 봐 걱정되고 힘이 돼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그러신 거겠지.”
“관장님도 참.”
“그러니까 이겨. 꼭 이겨. 꼭 이겨서 관장님 마음에 한풀이도 좀 해주고, 나쁜 놈들 콧대도 좀 날려버리고. 꼭 이겨라, 응?”
“긴장하지 말라는 분이 긴장되는 말만 골라서 하시면 어떡해요.”
“긴장은 하지 말고 각오는 단단히 하라는 뜻이지.”
선호가 웃으며 이한에게 글러브를 건넨다. 선호가 내미는 글러브를 받아든 이한에 주먹에 글러브를 끼웠다.
“가만히 있어 봐.”
이한의 앞에 꿇어앉은 선호가 이한의 신발 끈을 묶어준다. 한쪽이 느슨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너 계속 운동만 했었지?”
이한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며 선호가 중얼거린다.
“계속 운동만 하다가 막상 세상에 나가보니 힘들었지? 가방끈도 짧고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살아가려니 힘들었지?
세상이 다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다 그래.
그런데 다 그렇다고 그렇게 순응하며 살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한번 보여줘. 그런 세상에 한번 보여줘.
가방끈 안 길어도, 돈 없어도, 빽 없어도 뭔가를 향한 열정 하나 만으로도 멋지게 빛날 수 있다는 걸 한번 보여줘.”
“형.”
글러브를 낀 이한에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끈을 묶고 있는 선호를 내려다봤다.
“자, 다 됐다.”
이한의 운동화 발등을 손으로 가볍게 치며 선호가 일어난다. 그리고 눈짓한다.
“시작한다.”
“네.”
이한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밖에서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있었다.
*
“어, 형 차례다.”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온 지원이 시합이 막 시작하려는 걸 보며 의자에 앉았다.
“여기요, 누나 드세요.”
“고마워.”
“누나도 드세요.”
“어머, 나도? 고마워. 너 센스 있다?”
은서의 옆에 앉아 있던 혜주가 지원이 건네주는 콜라를 받아들며 생긋 웃었다.
“태경 씨도 좀 본받아요.”
콜라 캔을 따며 혜주가 애꿎은 태경을 타박이다. 아랫배가 살짝 더 나온 태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마침 비번이었고 이한의 시합이 있다고 해서 혜주를 따라 온 태경이다.
그리고 태경에게 맡겨진 사명은 오늘의 시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것.
지금부터 강철의 팔로 핸드폰을 고정시키고 시합 영상을 놓치지 않고 찍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진 남자인지라 옆에서 혜주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사장님은 안 오셨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원이 서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버려 둬. 파리 날리는 가게 지키고 있겠지.”
서진을 찾는 지원의 모습에 은서가 잘됐다는 듯 대답했다. 이제 제법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그래도 서진은 은서에게 껄끄러운 남자인 것이다.
적어도 은서의 눈에는 서진이 아직도 호시탐탐 이한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이한 씨 이기면 올림픽 나가는 거야? 그러면 이한 씨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겠네? 우와, 유명인하고 알게 지내는 기분이야.”
은서의 옆에서 혜주가 덩달아 들뜬 기분이 되어 있다.
“복싱은 중계 안 해준대.”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비인기 종목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실은 나도 예전에 일요일에 복싱 경기 나오면 채널 돌렸어. 저런 재미없는 걸 보여줄 시간에 드라마나 하나 더 보여 달라고 욕하면서 말이야.”
은서가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 한번 당해보라고 이한 씨하고 만나게 해준 것 같아. 너 싫어하는 복싱 선수하고 한번 사귀어봐라, 이러면서 말이야.”
“그거 말 된다. 그러면 난 어렸을 때 의사선생님 싫어해서 태경 씨 만난 거야?”
두 여자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장내 방송이 시작된다. 이제 막 시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늦었어, 늦었어.”
택시에서 내린 서진이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뛰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지만 늦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늦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 이유는 나오려는데 차 열쇠를 찾을 수가 없어서였고, 두 번째는 간신히 차 열쇠를 찾고 보니 다른 차가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차를 뺄 수 없어서였다.
가로막고 있는 차의 차주에게 전화까지 했지만 작정을 하고 전화를 받지 않아서 결국 도로변으로 뛰어가 택시를 잡아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차들은 왜 이리 막히는지,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택시 기사는 농담이나 던지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서진이 시계를 보며 뛰었다. 이미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이러다가 시합이 끝난 다음에 들어가면 그것보다 더한 낭패는 없다고 생각하며 서진이 체육관을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간 서진의 귀에 사람들의 응원소리가 파고들었다.
넓은 체육관 전체에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열기만은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는 그 중심에 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링 위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때와 다름없이 포기할 줄 모르는 모습의 남자가 링 위에 서 있었다.
링 위에서 서서 주먹을 날리는 그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서진의 눈가에 눈물이 핑, 하고 돌았다.
정말 보고 싶었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문득, 생각을 했다.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응원의 소리를 높이고, 상대를 아는 사람들이 야유와 환호를 퍼붓는 이 작은 사각의 공간에 왜 내가 서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니, 왜 주먹에 이 글러브를 끼게 된 것일까.
- 복싱에 소질 있다.
그 한마디에 끼게 된 글러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어린 날에 들려온 한 마디.
- 복싱 해볼래?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생각했었다. 왜 엄마는 날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일까.
왜 엄마는 날 버린 것일까.
내가 쓸모없는 아이라서 버린 것일까?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쓸모없는 아이라서 날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숨어 있던 저린 생각 하나. 나는 쓸모가 없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럴 때 들려온. "너 진짜 잘한다. 열심히 하면 챔피언도 될 수 있을지 몰라." 그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웃음이 생겨났다.
할 수 있다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하늘 위를 나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하늘 위에서 추락한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었데. 출전할 선수 미리 자기들끼리 내정해놓고 선발전은 그냥 형식이고. 다 그래.
이 바닥이 다 그래. 그래서 관장님이 그러셨잖아. 한 방 아니면 안 된다고."
재능이 있어도, 실력이 있어도,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였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때, 동생이 생겼다.
핑계는 좋았다. 달아날 핑계는 최상이었다. 동생 때문에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됐다는 핑계는 아주 적절했다.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속여 왔었다.
"동생을 부양해야 해서 더 이상 운동은 할 수 없어. 너무 좋아하는 복싱이지만 이젠 그만둘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어, 동생을 위해서야."
완벽한 핑계였다. 남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도망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를 만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나며 내 모든 것이 변했다.
여전히 나를 향해 등 돌리고 있는 세상을 향해 그녀는 겁먹지 말고 나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달아날 수 없었다. 달아나버리면.
"무책임한 남자가 되기 싫으면 끝까지 책임져요. 내게 상처주지 말아요. 날 포기하지 말아요. 내 인생, 한번 책임져보지 않을래요?"
내가 달아나버리면 내게 자신의 인생을 맡긴 그녀가 상처 입는다. 그래서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다.
어떤 핑계로도 달아날 수 없다. 내가 달아나면, 내가 겁먹고 피해버리면 내게 모든 것을 건, 나를 믿고 모든 것을 건 그녀가 상처 입는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이 작은 사각의 링 안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래들이 오고간다 하더라도,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멋지게 빛나는 모습을 보여줄 이들이 등 뒤에 있기 때문이다.
두 팔로 안아주고 싶은 소중한 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링 위에, 글러브를 끼고 왜 서 있는 것이냐고 스스로가 물어온다면, 모두와 함께 더 빛나게 살아가기 위해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 더는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