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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1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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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도 없이 경찰에게 붙들려 서로 향했다.



조사실에는 까칠한 인상의 수사관이 앉아 있었다. 처음 듣는 혐의 내용은 그녀가 현재 참여 중인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을 다른 회사에 유출했다는 거였다.



“하.”



말도 안 돼. 수사를 어떻게 했기에?



말을 들을수록 기가 차서 희민이 헛웃음을 흘리자 수사관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대부분 처음엔 그렇게 웃죠.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말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의 확실한 증거라뇨?”



희민의 어이없는 웃음이 짙어지는데 수사관이 여유롭게 의자 깊이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노트북으로 영상을 틀었다.



“일단 보시죠.”



수사관이 보기 좋게 노트북을 돌려 주자 희민이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화면은 부장의 집무실 CCTV였다. 화면 속의 여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CCTV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 일부러 얼굴만 나오지 않게끔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은 누구죠?”



희민이 눈을 가늘이자 수사관이 건들거리며 턱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누구긴요. 한희민 씨 아닙니까. 누가 봐도.”



나일 리가.



미간을 바짝 좁힌 희민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수사관 말대로 화면 속 여자는 누가 봐도 한희민으로 보였다. 자신조차 그렇게 보였으니까.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체형도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그 여자는 초조한 사람처럼 문 쪽을 수시로 살피며 PC에서 무언가를 USB로 옮겼다. 

그러더니 캐비닛에서 서류를 몇 개 챙겨서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



영상이 끝나자 자신의 손톱 옆 삐져나온 살갗을 심드렁하게 긁어내던 수사관이 희민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시 보여 줘요?”

“아뇨.”



희민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니 확연히 알았다.

이건 자신이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라는 걸. 빠져나올 구멍이란 구멍은 이미 철저하게 막았을 거였다. 

그리고 그 상대는 자신의 집무실과 부장의 집무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고도 흔적을 감출 수 있는 회사 내 권력자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그 권력자와 내통하고 있거나.



머릿속에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 나가면 나갈수록 희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수사관이 즐겁다는 듯 바라봤다.



“왜, 더 웃어 보지 그래요. 한희민 씨. 아까처럼.”


“…….”



조소하는 듯한 수사관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희민이 생각에 잠겨 있자 수사관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렸다.



“이봐요. 내 말 들립니까?”



조용히 앉아 있던 희민이 생각을 정리한 듯 수사관을 바라봤다.



“저 화면에 찍힌 시간에 전 집 앞 카페에 있었어요. 아파트 입구에 있는 카페니까 거기 CCTV를 확인해 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감정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이런 확실한 증거로 보이는 화면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아니고선.



화면에 나온 날짜와 시간으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니 그때 자신은 퇴근 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막힌 아이디어를 짜내다가 집에 들어갔던 게 떠올랐다.



수사관이 눈을 크게 뜨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간에 한희민 씨가 카페에 있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 화면에 나온 사무실이 아니라?”

“네.”



희민이 대답하자 이번엔 수사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 그것참. 한희민 씨.”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른 수사관이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깍지를 꼈다.



“보통 사람들은 4개월 전 자신이 그 시간에 뭘 했는지 날짜만 보고 떠올리질 못해요. 뭔가 특별한 일정이 있던 게 아니고 그냥 집 앞 카페에 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해요?”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희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군요.”

“아니 믿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생각해 보라고요.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보통은 4개월 전 일은커녕 한 달 전 일도 안 떠오른다니까? 일부러 알리바이 만들어 둔 사람처럼 그렇게 어설픈 티를 내면 어떡합니까. 이런 거대한 일을 벌인 사람이.”


“…….”



“그리고 4개월 전 화면까지 누가 가지고 있어요. 보통 길어 봐야 3개월 주기로 삭제되는데.”



수사관의 말을 들을수록 희민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느낌을 받았다.



‘당장 변호사를 선임해야 해. 그리고…….’



머릿속에서 곧바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던 희민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철저함을 보인 상대에게?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내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한다 한들 이기지 못한다.

희민이 입을 다물고 나서야 수사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좀 현실 파악이 되시는 모양이네.”



수사관은 잘나가는 엘리트에다 미인 여성의 몰락을 보는 게 꽤나 고소하다는 심리를 전혀 숨기지 못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변호사 잘 구해 보셔야 할 겁니다. 이런 사건을 누가 맡으려 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신은 구속된다.



‘그럼 엄마는…….’



구속 이후의 상황을 떠올리자 지금껏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구속되어 버리면, 엄마는?’



암 판정을 받고 입원해 있는 엄마의 치료비를 낼 사람도, 돌볼 사람도 자신밖에는 없었다. 

그 순간 희민의 머릿속은 정지했고 발밑이 지하까지 훅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잠깐만요. 이건 내가 벌인 일이 아니에요.”



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사관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수사관이 그런 그녀를 흘긋 내려다봤다. 

왜 이제 와서 이러냐는 식으로 멀뚱하게 보던 수사관이 희민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그런 말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난 뒤에 변호사에게 말하세요.”



밀어 내려는 수사관의 팔을 억지로 잡은 희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난 이렇게 구속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구속돼서 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이!”



수사관의 턱짓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수사관에게 매달리는 그녀를 떼어 냈다.



“난 안 돼……. 난 구속되면 안 된다니까!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깟 화면 하나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게 말이 되냐고! 이거 놔요! 내가 아닌 증거를 찾아 오면 될 거 아니야!”



끌려 나가는 희민이 몸부림치는 모습을 수사관이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뻔뻔하게 잘만 얼굴 치켜들고 있더니.”



희민이 사라지자 혀를 쯧, 찬 그가 조사실 문밖으로 나왔다.



“범죄자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하는 멘트가 똑같냐. 어디서 대본 받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조사실을 나온 그가 하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피식거렸다.




***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희민은 최악의 판결을 받았다. 

회사를 상대로 수십억 원의 배상액을 내든가, 평생을 교도소에서 썩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판결은 희민에겐 사형 선고나 같았다.



죽는 것도 자신 혼자 죽는 게 아니다. 병에 걸린 엄마도 같이 죽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인간관계가 넓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척당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그녀의 몰락을 구경하듯 면회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힘들겠다. 어쩌니?’



위로하듯 말하지만 그녀들의 눈가에 맺힌 조소를 볼 때마다 희민은 처참함을 느꼈다.

유일하게 그녀를 믿어 준 동기가 한 명 있었지만 애잔하게 볼 뿐 회사에선 그녀에 대해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안해. 희민 씨. 난 희민 씨가 아니라는 걸 믿지만 혹시 공범으로 의심받을까 봐…….’

‘괜찮아. 사과할 거 없어.’



이미 희망이 사라진 마당에 더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병원에 미리 결제해 둔 돈이 지난달에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연이은 패소로 변호사 비용도 마련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사람 인생이 이렇게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구나.’



파리한 안색의 그녀에게 차 실장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어떤 제안인지는 알려 드릴 수 없지만, 한희민 씨가 저희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 배상액은 모두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희민이 말없이 차 실장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이렇게 되길 기다렸다는 듯 절묘한 타이밍에 찾아와 이런 제안을 하다니……?



“배상액이 얼마인지는 알고 오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차 실장은 고저 없는 톤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급작스러운 제안이라 믿기 힘드실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희민 씨 어머니가 지금 병원에서 강제 퇴거 요청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희민이 움직임을 멈추고 차 실장을 바라봤다.



‘다 알고 왔구나.’



희민은 차 실장이 준 명함을 다시 들여다봤다.



태원그룹 회장실 직속 비서실장 차영주.



이 직함이 적어도 사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대화하면서 느낀 바로는 앞의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지금까지 업무상으로 수많은 사람을 대했던 그녀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희민은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 실장을 마주 보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제안이기에? 장기를 모두 파는 일쯤 되는 건가?’



한 사람의 목숨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돈 몇백만 원이 없어서 죽는 일도 비일비재한 세상인데.



무의미한 생각을 머릿속에 잠시 떠올리던 희민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자신의 인생과 엄마의 목숨은 사라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엄마의 목숨이라도 구하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거였다.



희민이 대답을 들은 차 실장이 안경테 너머로 시선을 맞춰 왔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희민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 볼 시간이 더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결론은 같으니까요.”



희민이 표정 변화 없이 말하자 차 실장이 알겠다는 듯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시네요. 그럼 저희 쪽 변호사 통해서 다 정리시킬 테니 나오시는 대로 바로 계약서 작성하기로 하죠.”

“네.”



희민은 차 실장이 휴대폰 녹음을 종료하는 걸 지켜보며 대답했다. 

평온한 일상이 하루아침에 깨진 뒤로 현실감 없는 일의 연속이었는데 이젠 여기에도 익숙해진 걸까.

어떤 제안을 할지도 모르면서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걸 보면.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희민은 시선을 들어 면회실을 나가는 차 실장의 짧은 커트 머리를 바라봤다.



‘이게 악마의 제안이라도 난 받을 거야.’



악마의 제안이 제 목숨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기필코 저를 이 지옥으로 떨어뜨린 상대를 찾아 복수할 기회를 잡을 거였다.



‘그게 누군지 반드시 찾아낼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희민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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