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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10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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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민 씨.”



이미 자신이 한희민인 걸 알고 있지만 확인하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네.”



희민이 조용히 대답했다.



“보내 주신 건 다 확인했습니다.”



남자는 의도적인 건지 희민을 보지 않고 전방만 보며 말했다. 희민은 그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어두운 강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누군지 찾을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 찾길 바라시는 겁니까?”


“찾을 수 있는 범위까지 전부요.”


“전부라…….”



남자가 지포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말이 없었다.



“억울합니까?”



잠시 공백을 두고 들린 말에 희민이 저도 모르게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이 일을 하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체형이나 얼굴이 지나치게 평범해서 인상에 잘 남지 않는. 옷차림도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듯 무채색으로 단조로웠다.



“억울한 모양이네요.”


“…….”



대답 없는 희민의 심리를 파악한 듯 그가 말했다.



“이해는 합니다. 그래서 이런 거액을 써서 저에게 의뢰를 한 거겠죠. 그런데 한희민 씨. 그건 아셔야 합니다.”



남자는 사뭇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알아보니 한희민 씨는 업무적인 면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꽤 매스컴을 탄 사람이던데요.”


“그저 인터뷰 몇 번 했을 뿐 유명하다고는…….”


“그래도 성공한 여성으로 인터뷰한 매체가 한두 군데는 아니던데 그런 사람은 사회적인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이미지 메이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경쟁사일 수도 있겠고, 질투를 느낀 어떤 높은 직책의 개인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사적인 원한일 수도 있겠죠.”


“……그렇겠죠.”



희민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원한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하는 말을 들으면 가능성은 너무 많아진다.



“설사 누군지 안다고 해도 아마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대일 가능성이 커요. 이번 일도 보면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습니다. 개인이라면 무척 돈이 많은 상대겠고.”



달칵, 달칵.



남자가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규칙적으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말을 이었다.



“즉 막상 누군지 알게 되면 억울한 마음은 풀리겠지만 한희민 씨 입장에선 생돈 날릴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거죠. 권력자는 아무도 이기지 못해요. 결국 돈을 이기지 못하니까.”



남자는 자기 딴에는 선의의 충고를 하고 있었다.



희민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돈으로 뭐든 할 수 있는 남자와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했으니 이해 못 할 리가. 

그 돈으로 이런 남자도 고용할 수 있게 된 거니까.



“……알아요.”



희민이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하자 남자가 힐긋 쳐다봤다.



“그래도 찾고 싶어요?”


“네. 찾아 주세요.”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남자를 마주 봤다.

희민도 처음 사건을 겪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거였다. 

그건 그저 개인의 장난 같은 게 아니라 자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의 짓일 거라고. 

설사 남자의 말처럼 결과적으로 아무 복수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지도 모르는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대답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설명드렸습니다. 그때 돼서 말 바뀌면 안 돼요.”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희민의 표정과 말투를 확인한 남자가 차 문을 열었다.



“계약서는 퀵으로 보내 드리죠.”


“잘 부탁드려요.”



남자가 차에서 나가자 희민이 시선을 돌려 전방의 일렁이는 강을 바라봤다. 

저녁 하늘과 동화된 듯 어둡게 일렁이는 강물이 그 남자의 눈을 떠올리게 했다.

검푸르고 짙은 묘한 빛깔의 그 눈동자가.



“…….”



옆의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희민은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막상 의뢰를 하니 생각과 다르게 기운이 빠졌다. 

그건 남자가 한 걱정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불안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 안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이 소진되어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던 그때와는 다른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 가자.’



한참을 앉아 있던 희민은 시동을 걸고 한강을 빠져나왔다. 밤거리를 달려 집으로 향하던 그녀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저 차…….’



뒤에 차 하나가 자신을 따라붙는 느낌에 희민이 사이드 미러를 살폈다. 

아까부터 꽤 오랜 길을 왔는데 저 차가 계속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바로 뒤에 있기도 했지만 주로 차 한두 대를 사이에 두고 보였다.

평범한 차종이니 기분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육감의 문제였다.



‘저 차는 날 쫓고 있어.’



언제부터?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치밀어 드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희민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언제부터지? 병원에 갔을 때? 아니면 한강으로 갔을 때?’



은밀한 만남을 가져야 하기에 한강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건데 그것부터가 누군가의 눈에 들켰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 보니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바로 서정혁의 저택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망가뜨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을 쉽게 보지 않을 거였다. 

그쪽 시나리오대로면 한희민은 지금 교도소에 있어야 하니까.



‘심지어 그 일을 캐고 있다는 걸 알면…….’



겁먹지 마. 내가 왜 겁을 먹어야 해?



희민은 자신을 망가뜨린 정체도 모르는 상대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핸들을 잡은 손은 점점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Rrrr. Rrrr.



“!”



핸들 옆에 고정시켜 놓은 휴대폰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희민은 흠칫 놀랐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액정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그걸 본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탁 풀렸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희민이 통화를 연결했다.



“석호 씨?”



***



잠시 뒤 희민은 캐주얼 다이닝 바가 있는 건물에 주차했다. 

끼익,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서 차를 세운 희민은 잠시 사이드 미러를 보고 있었다. 

뒤에서 자신을 쫓던 차가 따라 들어오지 않을까 한동안 지켜보던 희민은 아까 그 차가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기분 탓이었나?’



석호와 만나기로 통화한 뒤 다시 봤을 때 그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약속 장소로 오는 내내 누군가 자신을 뒤쫓는 느낌은 없었다.

바짝 긴장했던 몸을 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희민은 다이닝 바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석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민 씨. 여기.”



희민을 본 석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도 마주 웃으며 그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바쁜 일은 마무리된 거야? 한참 걸릴 거 같다더니.”



얼마 전 약속한 대로 맛있는 식사 사 주겠다고 석호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땐 조만간 시간을 잡기로 하고 끊었는데 방금 전 석호에게서 지금 시간 괜찮으냐는 전화를 받은 거였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게 됐어. 석호 씨 잘 지냈지?”


“나야 뭐……. 그보다 괜찮아? 그동안 재판이니 뭐니 고생 많이 했는데.”


“고생은.”



희민이 흐리게 웃고는 메뉴판을 펼쳐 석호에게 밀었다.



“우선 갚아야 할 게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거부터 다 시켜. 석호 씨 덕분에 도움 많이 됐거든.”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는데 뭐. 그래도 많이 먹는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석호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석호의 이런 부분이 편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할 때도 그는 뒤끝이 없고 남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희민의 결백을 믿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거고.



‘난 희민 씨 말 믿어. 희민 씨가 그럴 이유도 없잖아. 이미 충분히 잘나가는데 그런 일 해서 뭘 얻을 게 있다고.’



그 말이 나락에 빠진 당시엔 구원이 되지 않았지만 그 후에 오히려 위로가 됐다. 적어도 한 명은 자신을 믿어 줬다는 사실이.



“그래. 편하게 많이 시켜.”



희민은 굳이 속에 있는 말은 다 하지 않았지만 감사함을 담아 말했다. 

이런 음식 몇 번 사 주는 걸로는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됐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게 괜스레 멋쩍기도 했다.

그저 언젠가 석호가 힘들 때도 자신이 힘이 되어 주기로 조용히 마음먹었다.



석호는 그녀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냥 대식가인지 어쨌든 희민이 원하는 대로 많이 주문을 했고 그래서 희민도 편하게 식사를 했다.

한동안 석호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식사가 끝나 갈 때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걱정 많이 했었어.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서 정말 평생 있게 되면 어쩌나 하고.”


“…….”



희민이 미소만 띤 채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오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어?”



석호가 궁금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으로 희민을 바라봤다. 

석호가 아니라 누구라도 궁금할 문제긴 하겠지만 계약 위반이라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설사 계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누가 도와준 것 같긴 한데 혹시…….”


“석호 씨가 궁금해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문제라.”



희민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석호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난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물어본 것뿐이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희민이 엷은 미소를 짓자 그 얼굴에 안심한 듯 석호가 마주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풀려났다고 연락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사실 주변에 말도 못 하고…….”



석호가 말끝을 흐렸다.



“이해해. 내 이야기 하면 석호 씨도 회사에서 의심받을 테니까.”


“아, 그런 뜻은……. 아니 솔직히 그런 뜻도 있었어. 미안해. 희민 씨 그렇게 되고 보니까 나도 솔직히 무섭더라고.”


“아니야. 전에도 그랬지만, 솔직히 말해 주는 게 오히려 편해.”



희민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자 석호가 안심한 듯 웃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난 내가 싫더라고. 희민 씨 억울한 거 알면서 회사 사람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사람들이 희민 씨 욕할 때도 그러지 말라고 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이 한심했어. 무척.”



착잡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석호를 희민이 바라봤다. 문득 병원에서 서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



‘이 남자가 그 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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