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7장(2)
“그게 더 실용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정이 남은 채로 지구 반대편까지 오고 가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아아…… 실용적.
희민의 얼굴에 순간 씁쓸함이 맺혔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출장이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관계를 가졌던 그였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실용적이니 비효율적이니 그런 말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상했다.
‘그게 계약 조건인데 기분 상할 게 뭐 있어.’
표정에서 씁쓸함을 지운 희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권은 집에 있어요. 아파트 입구 보안 카드는 내 지갑에 있고 현관 비밀번호는 차 실장님에게 알려 드릴게요.”
“나에게 말해요.”
정혁이 바로 전화하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718273이요.”
“입구 보안 카드는 메이드에게 전하면 됩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정혁이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뒤 희민이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애써 씁쓸함을 지웠지만 기분이 바닥을 치는 느낌이었다.
오늘 기분이 계속 다운이라 그런가.
그래서 자신도 말실수를 하고 정혁의 말에도 서운하게 느껴지고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꾸만 물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정혁은 잘못한 게 없었고 필요하다면 어디든 그를 따르는 게 계약상 맞았다.
그런데도 왜 이리 심란하고 착잡한지.
짐 정리를 해야 하는데도 희민이 무기력하게 서 있는데 그때 유리가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옷부터 넣겠습니다. 가져갈 걸 말씀해 주시면…….”
“그 정도는 내가 할게요.”
유리가 캐리어를 열고 짐을 넣을 요량으로 말하자 희민이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저지했다.
“며칠 동안 머물 짐을 싸야 하나요?”
희민이 묻자 유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열흘…….
저택 안에 갇힌 생활이다 보니 답답하긴 했었다. 잠깐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온다고 생각하면 나쁠 일도 아니다.
희민은 그렇게 마음먹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노트북은 가져가도 되죠?”
희민이 노트북 가방을 먼저 꺼내 들며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는 희민이 짐을 싸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
“이런 건 혼자 잘하니까 괜찮아요.”
희민은 수시로 해외 출장을 다녔기 때문에 캐리어에 짐을 싸고 푸는 건 익숙해져 있었다.
꽤 오랜만이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필요한 물품들을 질서 있게 캐리어에 넣는 것을 유리는 멀찍이 서서 바라봤다.
***
이곳에 온 뒤로 저택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저택 현관 밖으로 나가는 건 계약에 위배되기 때문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강제로 잡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원해서 두 발로 들어온 거라 딱히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다.
교도소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좋았고, 그 대가로 자신이 갖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을 타고 넓은 정원을 지나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
창문을 살짝 열어 외부 공기를 들이마신 희민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서정혁은 말없이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체격 좋은 그의 몸에 근사하게 핏 되는 슈트를 입고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에 시선을 둔 모습을 보니 집 안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일만 하고 있는 그를 잠시 보다가 희민은 문득 그와 자신이 대화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걸 떠올렸다.
저택에 있을 때도 두 사람이 대화한 건 관계 중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 외엔 희민이 뭔가 필요하거나 오늘처럼 그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의 짤막한 대화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정혁이라는 남자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 역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행위로 몸 구석구석 건드리며 알아낸 성감대밖에 없을 거였다.
그게 아니면 계약 전에 보고받은 자신의 정보 같은 것들이나.
‘그렇다는 건 왠지…….’
거기에 특별히 서운함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 같이 앉아 있으면서도 전혀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를 보니 왠지 가슴 부근이 묵직하게 눌리는 기분이었다.
섹스라는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긴장도 되고.
희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그녀가 곧 전화를 받았다.
“석호 씨.”
희민의 밝은 목소리에 정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을 알 리 없는 희민은 전화 속 목소리에 집중했다.
― 그거 구해서 메일로 보내 놨어.
“정말? 벌써?”
기다렸던 말에 희민의 눈이 반짝였다.
― 별로 구하는 데 어렵진 않았는데, 작년 창립 기념식 참석 명단은 왜 필요한 거야?
“그럴 일이 좀 있어서. 아무튼 고마워. 지금 바쁜 일 끝나면 만나서 꼭 보답할게.”
― 어려운 일도 아닌데 보답까지야. 그래도 맛있고 좋은 데 알아 둘게.
“그래. 알았어.”
희민이 미소 지었다.
― 또 부탁할 거 있으면 거리낄 거 없이 해.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응. 고마워. 이만 끊을게.”
전화를 끊은 희민이 미소 지은 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를 믿어 준 석호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적어도 회사 내부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하지만 과연 떠오를까.’
그 뒤로 줄곧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생각나지 않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참석 명단을 본다고 떠오를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정말 그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목소리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저 그날, 우연히 그런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잖아.
‘여길 나가야 사람을 직접 고용할 수 있을 텐데…….’
돈이 든다고 해도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계약이 무사히 끝나야 가능하다.
‘지금은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할 수밖에 없어.’
마음을 다잡은 희민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빼 들었다.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찾아보고, 나머지는 계약 종료 후 나가서 사람을 구하든 뭘 하면 될 거였다.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대체 누가 자신을 망가뜨리기 위해 그 노력을 기울인 건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리던 희민이 문득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정혁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내 통화 소리가 방해됐죠?”
그의 일을 방해했다는 걸 깨닫고 희민이 사과하는데 그가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굽니까.”
“네?”
“방금 통화한 사람.”
희민이 눈을 깜빡이며 정혁을 바라봤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혹시 의심하는 건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통화하는 사람을 의심한다는 건 이 계약의 함구 규칙을 어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일 거였다.
“다녔던 회사 동기예요. 계약 내용은 알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석호와의 통화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의심받을 건 없다고 생각하며 희민이 대답했다.
“…….”
그녀를 잠시 보던 정혁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희민도 노트북을 켜고 기내에서 읽기 위해 석호가 보내 준 파일을 저장했다.
정혁의 전용기에 타게 된 희민은 내심 놀랐다.
세양그룹도 회장 가족이 타고 다니는 전용기가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전용기에 타 본 건 처음이었다.
세양그룹의 자랑인 전용기보다 훨씬 좋은 이 전용기가 잊고 있던 서정혁의 재력을 다시 상기시켰다.
내부에 마련된 정혁의 공간에는 피트니스룸과 욕실, 미니바와 개인 서재 등이 함께 있었다.
그가 운동하러 들어간 사이 주변을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하던 희민은 정신을 차렸다.
‘이런 데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꺼낸 희민은 파일을 열어 석호가 보내 준 명단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운동을 마친 정혁이 피트니스룸에서 나왔다.
그 소리에 희민이 고개를 들자 땀에 젖은 정혁의 모습이 보였다.
상의를 벗고 있어서 운동으로 펌핑된 상체 근육 모양을 따라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깊이 파인 복근 사이사이로 흐르는 땀과 오일을 바른 것처럼 번들거리는 남자의 근육질 몸을 본 희민은 순간 숨을 삼켰다.
정혁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하아…….”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희민은 가느다란 숨을 토해 냈다.
방금 전 땀에 젖은 그의 몸이 마치 격렬한 섹스 중의 모습 같아서 일순 다리 사이가 본능적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왜 이러지?’
매번 봐 왔던 모습인데 새삼스레 이렇게 흥분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저택에 있는 동안 그에게 완전히 몸이 길들여져 버린 걸까? 아니면 처음으로 저택이 아닌 다른 공간에 함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정혁이 같은 공간에서 샤워 중인 것도 신경 쓰여 괜히 노트북 위로 키보드만 매만지고 있는데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희민이 긴장을 숨기고 담담하게 정혁을 쳐다봤다.
젖은 머리칼로 나온 그는 여전히 상체를 벗은 상태였고 아래는 운동복이 아닌 슬림한 핏의 짙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정혁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열기를 마주하자 희민의 가면이 흔들렸다.
쿵, 쿵.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혁을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대감으로 순식간에 젖어 든 팬티를 느낀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혁이 걸음을 멈추고 문 쪽을 쳐다봤다.
“네.”
그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휴대폰을 들고 있는 차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에드워드의 전화입니다.”
정혁은 셔츠를 어깨 위로 걸쳐 입으며 차 실장에게 걸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휴대폰을 정중하게 내미는 차 실장의 시선이 아직 단추를 채우지 않은 정혁의 맨살에 닿은 것이 보였다.
탁.
희민은 잠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정혁의 벗은 몸을 보면서도 익숙한 듯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차 실장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아, 그때…….
처음 저택에서 잔 다음 날, 정혁의 등에 상처를 냈다고 차 실장이 굳은 얼굴로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방금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보고 알게 됐던 걸까? 자신이 낸 손톱자국을?
신경이 쓰이는 걸 차단하듯 짧게 고개를 저은 희민이 노트북 화면 안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