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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15장(1)

짤의민족 0 78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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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퍼스 장미와 리시안셔스, 유칼립투스, 그리고 부풀리움을 이용해서 바스켓을 만들어 볼 거예요. 플로랄 폼에 꽂을 때 정중앙이 가장 시선이 가는 부분이니까 특별히 신경 써 주셔야 해요. 우선 컨디셔닝 작업부터 시작해 볼까요?”



원장의 말과 함께 한낮의 조용한 작업실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섬세한 손길로 꽃들을 정돈하는 사람들 속에 희민도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칼을 하나로 깔끔하게 묶은 희민은 여섯 명 정도 되는 다른 회원들보다 천천히 밑 작업을 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컨디셔닝 한 뒤에 플로랄 폼에 꽃꽂이를 하고 있는데 원장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희민 씨는 장미 안 써요?”



장미와 리시안셔스로 화려하게 꽃을 배치하고 있는 다른 회원들과 달리 희민은 온통 푸른 밭이었다.



“녹색이 보기 좋아서요.”


“그래도 풍성한 꽃이 있어야 보기 좋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볼 거니까.”



희민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원장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보다가 자리를 비웠다.



“음, 그럼 이 수국이라도 사용해 볼래요? 이건 수업용이 아니라 오늘 내 작업 할 때 쓰려고 가져온 건데 여기에 어울릴 거 같아서요.”



준비실에서 하얀 수국을 한 단 가져온 원장이 희민에게 내밀었다. 

화려함은 없지만 올망졸망한 하얀 꽃들을 보자 희민이 보조개가 파인 얼굴로 웃었다.



“이건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



수국을 받아 든 희민은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원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희민을 바라봤다.



‘독특한 취향이네.’



누구보다 화려한 외모를 가진 희민은 남들은 메인으로 쓰는 꽃들엔 늘 관심이 없었다. 

크고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색들의 꽃들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메인을 위한 장식으로 사용되는 종류의 꽃들에 관심이 많았다.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해 배우는 사람들과도 달랐다.

딱히 창업이나 일자리를 위해 배우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수업 때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결과물도 본인이 만족해서 가져가곤 했다.



‘그거면 된 거지.’



사람마다 차이는 있으니까.



희민을 지켜보던 원장은 다른 회원을 봐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수업이 끝난 뒤 희민은 싱그러운 녹색으로 가득한 바스켓을 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이번 작업물은 중간중간 하얀 수국이 별사탕처럼 배치되어 어딘가 귀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즐거운 걸음으로 집에 들어온 희민은 테이블 위에 오늘의 작업물을 올려놨다.



“테이블과도 잘 어울린다. 다행이야.”



희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스켓을 바라봤다.



집 안 곳곳에 희민이 작업한 꽃들이 있었다. 

이제 말라 버린 꽃다발과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화병들 중에 오늘 작업해 온 바스켓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생각하던 때 우연히 동네에 플로리스트 클래스가 있는 걸 알게 됐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일단 배워 볼까 싶어 시작했는데 막상 클래스를 진행해 보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첫날 작업실 가득한 싱그러운 풀 향기를 느꼈을 때 이 일이 좋아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실에 있는 동안에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좋았다. 

뭔가 성과를 내야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도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스켓을 보고 있던 희민이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아, 벌써…….”



생각보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걸 이제야 안 희민은 얼른 바스켓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



“이게 오늘 작업한 작품?”



중식당 안에서 희민이 보여 준 사진을 들여다보며 정혁이 말했다.



“작품까지는 아니지만, 오늘 작업한 건 맞아요.”



요즘 희민은 매일 정혁을 만나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찾아오면 딱히 거절할 말도 없긴 했다. 

오늘처럼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최근엔 자신이 정말 거절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정혁이 사진을 꽤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니 조금 민망해진 희민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줘요.”


“…….”



무슨 대회에 출품한 작품을 심사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사진을 보던 정혁이 천천히 휴대폰을 희민에게 건넸다.



“오늘 게 가장 즐거워 보이네.”


“뭐가요?”


“그냥, 사진이 그래 보여서.”



정혁이 가벼이 웃으며 하는 말에 희민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에도 즐겁게 작업하지만 오늘이 가장 즐겁긴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안 걸까.



“예전에 좋아하던 취미인가?”



요리가 나오자 정혁이 회전 테이블을 돌려 희민의 앞으로 접시가 가도록 만들었다. 

이런 그의 자연스러운 배려에 처음엔 놀랐는데 이제는 희민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 해 봤어요.”


“갑자기 배워 보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 시작한 건진 들은 적 없는 것 같아서.”



정혁은 오늘도 요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희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달라진 태도는 낯설었지만 시선은 익숙했다. 그 집에서도 정혁의 시선은 늘 저런 식으로 자신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우연히 배우게 됐어요. 동네에 클래스가 있는 걸 보게 돼서요.”



희민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다른 일을 배워 보려고 했는데 당분간은 이렇게 클래스 들으면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경제적인 부분은 그 계약 덕분에 어느 정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됐으니까.”



희민이 솔직하게 말하고는 정혁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말의 의미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였다.

자신을 관찰하듯 보고 있는 정혁에게 희민이 말했다.



“……그 부분에서 당신은 손해네요. 결과적으로 계약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니까.”



이런 말은 꺼내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희민은 최대한 무겁지 않게 말했다.



처음부터 자신 쪽의 사유로 계약을 파기하는 게 아니라면 임신이 되지 않더라도 계약서에 명시된 금액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의 말처럼 임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건 모르고 있던 때긴 했다.

정혁이 재벌이라서 가능한 금액이긴 하겠지만 일반인의 기준에선 사실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재판에서 사용된 비용까지 합치면 더 그랬다.



“손해 아닌데.”



관찰하듯 희민을 보고 있던 정혁의 입술 끝이 유려하게 휘어 올라갔다.



“잘못 생각한 거야. 난 전혀 손해라고 생각 안 하니까.”


“…….”



말없이 그를 마주 보고 있던 희민이 접시가 있는 쪽을 정혁에게 돌렸다.



“당신도 덜어요.”



정혁이 앞접시에 요리를 더는 걸 보며 희민도 자신의 접시를 바라봤다. 

정혁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금 그의 말로 마음속의 부채감이 아주 조금쯤은 덜어지는 느낌도 있었다.



임신이 안 된 게 제 탓만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계약서상의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었다. 

비록 그 끝을 만든 게 정혁 때문일지라도.



“정혁 씨.”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던 희민이 그를 불렀다. 깔끔하게 젓가락질하던 정혁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왜 계약을 종료한 거예요?”



희민의 차분한 눈동자가 정혁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됐다.



‘난……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면 안 되는 거예요?’



‘말했을 텐데. 그 부분은.’


‘……말했죠. 위험하다고.’


‘그래. 알고 있잖아.’


‘그래도 알고 싶다면요?’


‘무슨 뜻이지?’


‘내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래도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요.’


‘…….’


‘그럼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대화를 끝으로 계약은 종료됐다.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라 묻어뒀지만 전과 다른 방식으로 정혁과 만나게 된 이상 꺼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때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내 감정이 무의미하다고 말했던 건 실수였다고 했고.”



정혁이 냅킨으로 입을 닦고 물을 마신 뒤 대답했다.



“맞아.”


“이젠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말의 의미를.”



희민이 조용히 정혁을 바라봤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방금 떠올린 그날의 대화 내용은, 뭔가 다른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기억력이 좋다는 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이렇게 모든 대화가 정확히 기억날 때면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정혁의 대답이 왠지 두려워지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묻지 말걸.’



희민이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정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지면 당신이 위험해질 거라 판단했어.”



정혁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희민을 쳐다봤다.



“그땐 계약 종료 후 당신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일을 겪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고.”



그래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거라고……. 위험해지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희민이 빠르게 물었다.



“당신이 적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그게 당신이 김지훈으로 활동하는 것과 관련 있는 거고?”


“맞아.”



정혁이 순순히 대답했다. 재벌은 그녀가 모르는 다양한 위험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래서 정혁이 저택의 경호를 그렇게 삼엄하게 하는 걸 테고 실제와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는 이유도 그래서일 거였다. 

그의 희귀 체질로 인해 수혈도 받을 수 없다면 더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많기 때문에 계약을 벗어나면서까지 그를 알고 싶어 한 그녀가 부담이 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계약을 종료한 거고…….

하지만 상황을 대부분 납득할 수 있음에도 서운해지는 이유는 뭘까.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 위험해진다면, 그럼 지금은 왜 다 알려 주는 건데요?”


“내가 지킬 거니까.”



희민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땐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라서 그랬던 거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야.”



그의 확신을 담은 눈을 마주 보는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설사 위험해진다고 해도 나는 널 내 옆에 두고 싶어.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정혁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 써서 단어를 고르고, 눈썹을 조금씩 찡그리면서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희민이 없으면 안 되거든. 나는.”


“…….”



정혁의 얼굴은 그때의 그와 똑같으면서도 달랐다. 

진지하게 빛나는 눈이 달라진 그의 감정만큼 강하게 직시해 왔다. 조용히 보고 있던 희민이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이유야.”



정혁의 낮은 목소리에 희민이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누군가를 잃기 싫다는 감정은 처음이라서 실수했지만 이젠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아. 난 널 놓치지 않을 거니까.”


“…….”


“다시는.”



그의 열기가 번진 눈빛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희민을 옭아맸다. 공중에서 엉켜드는 시선이 그녀의 온몸에 열감이 번지게 하고 있었다.



‘역시 듣지 말 걸 그랬어.’



점점 더 퍼지는 열감을 느끼며 희민은 후회했다. 지금 정혁이 한 말로 인해 자신은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한번 들은 이상 결코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희민은 완벽히 그의 시선에 포박된 채 그렇게 앉아 있었다.




***




“요즘은 일이 괜찮니?”



서희의 질문에 병실 창밖을 보고 있던 희민이 고개를 돌렸다. 서희가 침대 위에 앉아 희민을 보고 있었다.



“응?”


“여기 자주 오는 거 보니까 일이 많이 바쁘지 않은 거 같아서.”


“아아…… 응.”



창가에서 몸을 돌린 희민이 머리칼을 매만지며 서희에게 다가갔다.



“저기, 엄마.”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희민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솔직히 희민 스스로도 아직 이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됐다. 

그저 엄마에게 잘난 딸이고 싶은 욕심과 계속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그녀 안에서 혼란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뭔데 그래. 말해 봐.”



서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야윈 뺨에 우아하게 피어나는 보조개는 희민의 것과 같았다. 그 웃음을 보며 희민이 용기를 냈다.



“나…… 회사 안 다녀.”



희민이 담담함을 가장하며 서희의 표정을 살폈다. 서희는 조금 놀란 듯 눈이 둥그레졌다.



“안 다닌다니. 퇴사했어?”


“사실 퇴사한 지 좀 됐어. 엄마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백수야, 나.”


“…….”



서희가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 뒤 그녀 얼굴 위에 떠오른 건 배신감이었다.



‘그럴 만해.’



희민은 미안한 마음에 침대 위 시트를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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