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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짐승 계약 #14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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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정오였다.
시간을 확인한 희민은 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을 들어 올려 가만히 바라봤다.


“……슬슬 해도 되려나.”


희민은 아침부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길었다.


아침에 연락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연락하기에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고. 
그냥 문자면 편할 텐데 굳이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이것저것 생각하게 됐다.


‘왜 전화 하나에 이렇게까지?’


새침하게 휴대폰을 흘겨본 희민은 마음을 정하고 어제 저장해 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던가. 마음먹은 것과 반대로 바짝 긴장하게 되자 희민은 휴대폰을 꼭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목소리 들려주는 거야.”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티 내자 희민은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 점심때밖에 안 됐잖아요.”

“난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어쨌든 오늘…….”


희민이 말하려는데 정혁 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수액이…….”

“됐으니 빼 줘.

“안 됩니다. 더 누워 계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지?


희민이 통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차 실장의 목소리와 정혁의 목소리, 그리고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약간의 웅성거림 후에 정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 가면 돼?”

“아, 아뇨. 문자 대신 전화 달라고 해서 한 거예요. 오늘 저녁에 우리 집 앞 카페에서 봐요.”

“저녁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시간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 줄게요. 그럼.”


얼른 말하고 전화를 끊은 희민이 고개를 기울였다.


“수액이라니,  병원인가? 어디 몸이 안 좋기라도 하나?”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 같아 묻진 못하고 끊었지만 들리는 소리로 보아 그런 것 같았다. 
그냥 피로 회복차 수액을 맞으러 병원에 간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빼 달라고 한 거겠고…….
그렇게 생각을 해 봤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게 해 줄게. 원한다면 어떤 거든 알게 해 줄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뭐든.’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혼자 추측하는 건 그만해도 되려나? 저녁에 그를 만나 물어보면 알 수 있는 문제일 테니. '


대답에 따라 그가 어제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도 알 수 있을 거였다.
그 수수께끼 같은 남자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한 희민이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 가 본다고 했던 사람인데요. 지금 출발하면 될까요?”


전화를 끊은 희민은 간단히 선크림과 립글로스만 바르고 집을 나섰다.



잠시 뒤 희민은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파트 입구로 걸어가는 희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벌써 3시잖아.’


지금 들어가서 샤워하고 준비하면 시간은 여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왠지 마음이 바빴다. 
저녁에 남자와 만날 약속을 한 게 얼마 만이더라. 소개팅 업체에서 매칭을 해 줬던 남자들이나 석호는 예외로 치면 정말 까마득했다.
특히 상대가 서정혁이다 보니 더 신경 쓰였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를 만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바삐 걷던 희민이 문득 정혁과 만나기로 했던 아파트 입구 앞의 카페를 바라봤다.


“어?”


희민의 걸음이 멈췄다.


카페 안에는 정혁으로 보이는 남자가 저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순간 잘못 봤나 싶었지만 서정혁은 잘못 볼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니다. 밖에서도 시선을 휘어 감는 깔끔한 데님 셔츠를 입고 있는 근사한 남자를 희민은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착각인가 싶었던 건 그의 옷차림 탓도 있었다.
헤어스타일도 평소보다 더 내추럴해서 앞머리가 단정한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와 있었다. 
옷차림과 그런 헤어스타일이 합쳐지니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서정혁은 대부분 슈트 차림이거나, 아니면 짙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늘 위압적인 분위기가 흘렀으니까.


그럼에도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은 여전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카페 안의 몇몇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고 있는 게 보였다. 
하긴 자신도 처음 정혁을 봤을 때 그랬으니 그 시선도 이상할 게 아니다.


‘잠깐. 그런데 지금 시간이…….’


홀린 듯 정혁을 보던 희민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저녁까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와 있는 거지?’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긴 카디건만 걸치고 있는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고 잠시 고민하던 희민이 그대로 카페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카페 종업원의 목소리에도 정혁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단정히 앉아 테이블 위만 보고 있었다.
누가 들어오든, 누가 나가든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혹시 내 연락을 기다리는 건가?’


남자답지 않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시간은 나중에 다시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보자고 했잖아요.”


테이블 앞에서 희민이 하는 말에 그때까지 누가 오는지도 관심 없던 정혁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란 듯 커진 그의 눈에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가 퍼져 나갔다.


“빨리 왔네. 생각보다.”


정혁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지금 그의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를 보던 희민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정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눈을 맞춰 왔다.


“저녁까지 기다리기 힘들어서 와 있었어.”

“그렇다고 이렇게 말도 없이 와서 기다리는 게 어딨어요. 바쁘다는 사람이…….”

“설레던데.”

“네?”


희민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살짝 치떴다. 정혁은 정말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저 얼굴이라도 볼 수 있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 때보단 훨씬 기분이 좋았어. 기다리면 한희민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기분이 설렌다는 건가?”


정혁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단어를 골라 가며 말했다. 
처음 느끼는 기분에 대한 신비로움이 그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그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자 왠지 얼굴이 뜨거워져 희민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밖에서 봤기에 망정이지, 난 준비도 못 하고 왔잖아요.”

“무슨 준비가 필요한데.”

“그냥, 뭐…… 약간의 화장이라거나.”


희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정혁이 가볍게 웃었다. 낯선 그의 미소가 번번히 그의 얼굴에 어리는 게 신기했다.


“지금 모습으로 충분해. 우선 주문 좀 하고 올게. 아메리카노? 바닐라라떼?”

“음. 아메리카노요.”


정혁이 자신의 커피 취향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에 희민은 조금 놀랐다. 
평소엔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당분이 당길 땐 라떼를 마시는 편인데 바닐라라떼를 더 선호하는 취향이었다.


희민은 정혁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 잔을 바라봤다.


“…….”


잔에는 커피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랜 기다림의 흔적처럼 보이는 그 잔을 응시하고 있는데 정혁이 돌아왔다. 
그가 앉자마자 희민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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