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6장(2)
블랙 셔츠에 마찬가지로 블랙 바지를 입고 있는 정혁이 소파 쪽으로 걸어오자 비서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가올 때까지 정중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진은 정혁이 소파에 앉는 모습을 보고서야 다시 앉았다.
모던한 디자인의 직사각형 소파에 느른히 앉은 정혁이 차 실장을 쳐다봤다.
“보고해요.”
채광 좋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정혁의 눈동자 색이 푸른 회색빛으로 보였다.
처음 본 사람은 다들 유심히 쳐다보게 되는 신비로운 색의 눈을 익숙하게 마주 보며 차 실장이 말했다.
“예상대로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차 실장의 말을 들은 정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곧바로 수락한 겁니까?”
“네. 읽어 본 직후에 바로.”
“…….”
정혁이 시선을 창밖으로 무심히 던졌다. 건조한 표정은 마치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을 승준이 힐끔거렸다.
승준보다 오래 함께한 차 실장이나 인영은 정혁에 더 익숙해져 있었지만 승준은 아직 그에 대해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꽤나 공들인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차 실장이나 인영이 이번 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회장인 정혁의 지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성사되고 그걸 보고하는 동안에도 정혁의 표정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하긴 승준이 지금까지 본 바로는 정혁의 표정에서 큰 변화가 있던 적이 딱히 없긴 했지만.
그때 창밖에 시선을 두었던 정혁이 다시 차 실장을 바라봤다.
“다른 보고 사항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려가 봐요.”
정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선 비서진들이 고개를 숙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려왔던 엘리베이터로 다시 향했다.
“우리도 가죠.”
이미 차 실장은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승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랐다.
“기쁘신 거…… 맞겠죠?”
로비로 내려와 일반 엘리베이터로 이동한 뒤에 승준이 슬쩍 말하자 인영과 차 실장이 돌아봤다.
“뭘?”
인영이 묻는 말에 승준이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회장님 말이에요. 이런 거액을 제시하신 거 보면 분명 이번 일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텐데 오늘 반응으로 봐선 도통 모르겠단 말이죠.”
“원래 그런 분이시잖아.”
인영이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딩―
비서실이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차 실장이 먼저 내리고 뒤이어 인영과 승준이 내렸다.
승준은 빠르게 앞서 걸어가는 차 실장 뒤에서 인영에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
“저, 그런데 회장님은 왜 어제 갑자기 자리 비우신 거였습니까?”
“그건 왜?”
인영이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 그게…….”
승준은 먼저 비서실로 들어가는 차 실장의 꼿꼿한 뒷모습을 힐긋거리며 인영에게 말했다.
“궁금해서 말이죠. 평소 말도 없이 갑자기 자리 비우시고 그러진 않으신 분인데 그새 한국까지 갔다 오셨다니까.”
“회장님 사생활 궁금해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
인영이 승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앞서 걸어갔다.
“사생활이라…….”
승준이 그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의 사생활은 비서실에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이렇게 돌출 행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혁이 갑자기 한국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걸 알고 한편으로 안심도 되면서 궁금해지는 거였다.
‘워낙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모시는 서정혁은 묘한 사람이었다.
2년 전, 승준은 이렇게 대우가 좋아도 되는 걸까 의심할 정도로 좋은 조건에 곧바로 이 비서실에 지원하게 됐다.
하지만 곧 여러 번 되풀이되는 면접과 필요 서류들, 거기에 각종 테스트까지 이어지자 중간에 입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 정도였다.
엄격한 과정을 거친 끝에 입사한 뒤에는 끝도 없는 비밀 조항 계약서에 사인해야 했다.
‘대체 회장이란 인간이 얼마나 해괴한 인간이기에 이래?’
태원그룹 회장의 추문에 가까운 소문들은 그도 알고 있었기에 이 많은 비밀 조항들은 그 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대면하게 된 서정혁은 그가 상상한 모습과 전혀 달랐다.
얼굴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미남인 데다 몸도 좋았고, 거기에 독특한 눈 색깔과 서정혁 특유의 묘한 분위기까지 겹쳐져 눈앞에 서 있는데도 실존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됐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수많은 추문들은 다 이 비서실에서 생산되어 퍼트려진 가짜 소문이라는 걸.
실제 서정혁은 어디에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의 태원그룹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소문처럼 늘 한국의 대저택에 고립되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서정혁은 다른 직함과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지금 그의 실제 집무실이 있는 이곳은 태원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진 회사였다.
한국의 저택 외에 철저한 보안과 통제가 이뤄지는 이 건물 안에 집무실을 두고 있는 이유도 승준은 아직 알지 못했다.
서정혁의 부모가 누군지,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나 젊은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일하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승준은 한숨을 내쉬고는 비서실로 걸어갔다.
인영이나 차 실장 모두 아직 자신에게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사실 알 방법도 없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말해 주거나 저절로 알게 되길 기다릴 수밖에.
***
펜트하우스처럼 인테리어 된 최고층으로 올라온 정혁은 서재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가 스크린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한쪽 화면에 떠 있는 숫자들을 잠시 쳐다본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밖으로 나왔다.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는 동안 지나치는 벽 대신 설치된 예술품들은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집 안 전체에 설치된 대형 조각품들과 그림들 때문에 이 펜트하우스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미술 전시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는 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크리스털 소재의 커다란 예술품을 파티션처럼 놓아 둔 곳을 지나자 바가 있는 공간이 나왔다.
진열장에 늘어놓은 고가의 버번 중에서 하나를 꺼낸 정혁이 투명한 위스키 잔에 따랐다.
잔을 한 손에 든 그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
전면 유리 밖으로 빌딩 숲이 내려다보였다.
높이 솟아오른 뉴욕 도심의 길쭉한 빌딩들을 표정 없이 내려다보며 정혁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버번의 향과 함께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계속 버번만 마시게 하네.”
이런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지만.
나른히 내뱉은 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이 버번과 함께 단단한 육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설명이 되질 않는데, 이건.”
버번 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정혁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찡긋거렸다.
‘이건 분명 리스크가 되겠지. 어떤 식으로든…….’
정혁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
탁.
브리프케이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차 실장이 의자 위에 앉았다. 빠르게 계약서를 꺼내 확인하던 그녀가 문득 눈을 가늘였다.
‘그런데 회장님은 왜 어제 갑자기 자리 비우신 거였습니까?’
방금 전 승준이 인영에게 했던 말은 그녀도 들었다.
승준의 말처럼, 서정혁 회장은 평소 단 몇 시간을 위해 전용기로 지구 반대편을 오고 가는 남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지금까진 알고 있던 그는 그랬다.
그래서 이번에 그가 급작스럽게 한국을 다녀온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저택에 다녀왔다는 건…… 그 여자 때문인가.’
한희민, 서정혁의 아이를 낳기 위해 그 저택에 불려 온 여자.
희민을 떠올린 차 실장은 그 여자가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회장의 돌발 행동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판단되지 않았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대로라면 생각보다 빨리 임신이 될 수도 있겠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계약상으로는 한희민은 그 저택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이 준비해 둔 최고의 시설로 거처를 옮긴 뒤 출산을 위한 케어를 받을 거였다.
그렇게 출산하기까지가 계약의 내용이다.
그 뒤 한희민은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다.
모든 건 정해진 대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혁이 돌출 행동을 보였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차 실장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한희민이 저택에 들어온 다음 날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뉴욕으로 떠날 일정이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정혁에게 갔을 때 마침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회장님, 등이…….’
정혁의 등에 핏기가 맺힌 손톱자국을 보고 놀라서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하지만 차 실장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 바로 정 박사님을 부르겠습니다.’
‘그럴 거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놔두면 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차 대기시키세요.’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자 상처에 대해선 한희민에게 말해 둬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찾아갔지만 정혁이 저지했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 느껴져 손톱만 다듬으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정혁과 함께 차에 오른 뒤에야 그에게 물었다.
‘등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습니다. 알고 계신 겁니까?’
‘이 정도 상처로는 무슨 일이 생기진 않습니다.’
‘상처가 습관화되면 감염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차 실장.’
‘…….’
‘내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죠.’
‘……알겠습니다.’
더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든 정혁의 그 시선을 떠올리니 그는 처음부터 예상을 빗나간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가.’
차 실장이 눈을 가늘이고 생각에 잠겼다. 정혁이 계속 그 여자에게 이런 돌발 행동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마 초기라 그럴 가능성이 클 테니 우선 판단은 지우고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결론지은 차 실장은 계약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